• 570돌을 맞아 초대 조선변호사협회 대표 박승빈을 추모함:

단군 이래 가장 경이로운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세종어제 훈민정음 완성 기념일이 다가오면 떠오르는 분이 있다. 한글학회의 ‘한글식 표기법’과 달리 조선왕조부터 대한제국시절까지 사용되어 온 ‘정음식 표기법’을 고수한 조선어학잡지 <#정음>(1934-1937)을 출간한 #학범 #박승빈 선생이 바로 그분이다.

운동경기만큼은 일본인들에 질 수 없다는 신념하에 초대 #조선축구협회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학범은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중앙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사립광무학교에서 수신과목 교사, 평양 공소 검사, 조선변호사협회 대표,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최남선, 오세창과 함께 계몽구락부를 조직하여 언론과 연설을 통해 구습 타파를 위한 #신생활운동을 펼쳐갔다(그의 연설문은 1972년 조선일보에 연재되기도 하였다).

연암 박지원의 후손인 그는 명문가 출신임에도 자주 빨래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흰옷을 입지 말도록 종용했는데 실제로 집안 제삿날에도 흰옷을 입지 않아 집안어른들로부터 몰매를 맞기도 하고, 이자 없이 소작인들에게 종자돈을 대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민사소송 전문 변호사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만큼 가난한 사람들, 반일 학생운동 수배자들을 위해 무료 변호도 서슴지 않았다.

백성을 깨우치기 위해 정음을 창제한 세종의 경우처럼 학범 역시 대중에게 좀 더 쉽게 법률 조항을 전파하려는 의도에서 변호사 개업 시절 <#헌법>(1908)과 <#언문일치일본국육법전서>(1909)를 번역 출간하게 된다, 이때 선조들이 사용해 오던 정음 철자법의 과학성에 매료된 학범은 평생을 정음연구에 몰두하여 정확한 철자법에 따른 우리말 사전을 집성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저술인 <#조선어학>을 교재삼아 동국대 전신 #중앙불교전문학교, 고대 전신 보성전문학교에서 조선어와 한문을 가르쳤다.

갑오개혁 때 국가적 사업으로 인식된 조선어 철자법 연구는 대한제국기인 1907년 #국문연구소 소관으로 남아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조선어 교과서 발간을 목적으로 최현배와 #오쿠라신페이 등을 조사위원으로 하는 철자법 개정을 추진하여 #조선어연구회 측의 안을 대폭 채택하자 조선어연구회로 이름을 바꾸고 학무국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 #한글식 표기법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해갔다. 이때 조선어학회와 총독부 #학무국의 #형태주의 #철자법에 반대해오던 박승빈을 지지한 윤치호, #최남선, 지석영, 권병훈, 이병도등 112인이 뜻을 한데 모아 동아일보가 주최한 공청회를 통해 반대 이론을 제시였으나 당시 #양주동, 김기림, 박태원, 노천명, 임화, 채만식 이은상 등의 작가들이 조선어학회측의 손을 들어주며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이 무렵 기부금 징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재정위기에 처해 독지가를 물색하던 보성전문 교장 박승빈은 조선어학연구회의 표기법을 동아일보가 채택해줄 것을 간절히 부탁하며 #김성수에게 학교 운영을 위임하게 된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한글식표기법을 채택하고, 맞춤법 논쟁은 조선어학회의 일방적 승리로 끝나고 만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한글식 표기법으로 번역된 성경 읽기가 어렵다는 불만이 고조되어 가자 #이승만 정권은 한글 간소화 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하지만 복잡한 한글 맞춤법을 고집하는 국어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고 만다. 당시 자유당 의원 #손도심은 이 국어학자들을 ‘민주대한에 출현한 폭군’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소리 나는 대로 쓴다는 원칙을 기본으로 삼은 한글맞춤법은 쉽지 않은 규칙, 납득하기 어려운 예외 조항을 규정하며 글쓰기에 혼돈을 초래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막내동생이라고 발음하지만 한글맞춤법은 ‘#막냇동생’을 옳은 말이라 한다, 지금은 ‘자장면’과 ‘짜장면’ 양쪽을 모두 표준어로 규정하고 있지만, 정음 규칙에 따르면 중국어 발음에만 ‘ㄲ, ㄸ, ㅃ, ㅉ’ 등 병서를 사용하게 되어 있어 그냥 소리 나는 대로 ‘짜장면’이라고 쓰면 되는 것이다. #고영근, #신창순, #송석중 등의 원로 국어학 연구자들조차 이러한 #조선어학연구회의 반주시경학파 이론의 현대적 가치를 인정하며 그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거의 모든 한글학회 논문집의 한글맞춤법의 문제점에 관한 논문에서조차 조선어학연구회 회원의 이름과 이론, 그 결과물은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우리말 사전 제작 경위도 그렇다. 원래 최남선이 주관하던 #조선광문회에서 김두봉과 주시경이 집필하던 말모이 사전 원고 작업을 계명구락부 시절 박숭빈이 계승했었고 이를 토대로 조선어학회가 사전을 출간하게 되지만, 이에 관한 언급조치 이루어지지 않는 실정이다.

공동체 내에서의 같음과 다름은 공존해야 한다. 이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하이데거가 존경한 언어학자 훔볼트, 프랑스 언어학자 #앙트완메이에의 언어학 이론을 국내 최초로 소개한 박승빈, 그는 조선 철자법의 역사를 존중하여 새로운 현실에 따른 새로운 법칙을 받아들이면서도 훈민정음이 지니는 역사성을 계승하려 했다. 그는 훈민정음 연구에 자신의 열정, 재산, 심지어 자신의 목숨마저 바쳤다. <#조선어학>, <#조선어학강의요지>, <#한글맞춤법통일안비판> <#간이조선어문법> 등의 저술은 이 시대에 다시 논의를 시작하여 초등학생들이 그토록 어려워하는 맞춤법을 좀 더 쉽게 만드는 연구에 자료로 활용되어야 한다.

박승빈 개인의 사비를 들여 출간하던 <#정음> 마지막호(37)는 등사판 인쇄물이었다. 변호사직마저 포기하며 훈민정음 연구와 교육에 헌신한 박승빈, 그를 역사의 그림자로 만들어 버린 우리, 이제 한글학회에서도 박승빈을 연구대상으로 사야 한다. 극기, 탈자아의 모범으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그는 지금 망우리에 묻혀 있다. 비록 그의 조선어문법 이론 모두가 효율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의 훈민정음 창제 관련 언급 모두가 합리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한글날 행사와 아울러 정음절 주간을 선포하여 그와 조선어학연구회의 역사성을 기리고, 사회적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하나의 도덕적 지침으로 삼을 만하지 않은가. 또한 교육자로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쥬의 전형으로 삼을 만하지 않은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