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집

생모리스 외가집

학교가 파하고 운동장에서 놀다 노을이 지고서야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꾸중을 듣고 식구들과 저녁을 함께하며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던 시절이 있었다. 변두리 산을 깎고 길을 내어 지은 초라한 시영주택단지에 살았지만, 누구나 집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꽤나 행복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어느 외항 선원이 선물하여 키우던 푸들 강아지 짖는 소리, 동네 담장에 핀 장미꽃 향기, 먼 길을 걸어 늘 함께 등교하던 동네 친구들의 웃음소리, 저녁이 되면 굴뚝에서 피어올라 마을을 채우던 굴뚝 연기…

우리 집은 엄마의 손길이 빚어내는 냄새들, 좁은 현관의 뒤엉킨 초라한 동생 신발 색깔들, 아버님이 켜 놓으신 구닥다리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장단들로 어수선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침묵을 지키는 아버지와 달리 온 집안을 살아 움직이게 하던 쨍쨍한 엄마 잔소리와 그 부지런한 손길이 그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어린 왕자』를 읽기 전까지 우리 집의 의미를 몰랐다. 아니 차라리 알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게 낫겠다. 그저 변두리 초라한 방 두 칸짜리 집을 신축하여 늘어난 방, 거짓말한 대가로 아버님께서 나를 거꾸로 매달아 놓았던 화장실 밖 굴뚝. 내게 어린 시절 살던 집은 특별한 사건과 관련된 잊혀진 추억의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어린 왕자』와 함께 집이 내게 소중한 보물로 새롭게 다가온 것이다.

생텍쥐페리는 늘 사막을 사랑해왔다, 하지만 사막에서 만난 어린 왕자가 달빛 아래 주름처럼 펼쳐져 있는 모래 언덕들을 바라보며 “사막은 아름다워.”라고 말하디 전에는 모래 언덕 위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 그였다. 그러던 그가 어린 왕자의 “사막은 아름다워.”라는 한 마디에 무엇인가 침묵 속에 빛나는 것을 보게 된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어딘가에 숨겨진 우물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문득 사막에 그 숨겨진 신비로운 광채가 이해되자 작가는 새로운 사실을 터득한다. 어린 시절에 전해 들은 “옛집에는 보물이 감춰져 있다”는 말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아무도 찾을 수 없었던 보물, 집안 전체를 매혹에 휩싸이게 했던 보물은 바로 보이지 않는 엄마의 마음이었다. 별과 비행기보다 엄마의 존재가 그를 무한한 문학적 상상력의 세계로 인도한 것이다.

 

“제게 무한함을 가르쳐준 건 은하수도 비행기도 바다도 아니었습니다. 그건 바로 엄마 침실에 놓여 있던 보조 침대였어요. 병이 난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었습니다. 우린 차례차례 돌아가며 병에 걸리고 싶었죠. 그건 감기로 인해 마음껏 헤엄칠 권리가 부여된 무한한 바다였습니다. 엄마 침실에는 사람 난로도 있었으니까요.”

 

나를 키운 것의 9할은 엄마의 다정한 무관심이었다. 반항심으로 방황하던 운동선수 시절, 다른 엄마들의 자식을 비난하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엄마의 다정한 무관심 덕분에 나는 입시에 찌든 황량한 사막에서도 별 탈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밤이면 장독에 올라 천체망원경으로 바라보던 달과 별은 아무 위안이 될 수 없었다. 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시당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시절, 그때는 몰랐으나 엄마가 나를 이끌고 있었다. 허락도 없이 고가의 문학 전집을 월부로 구입해도 외판원에게 불쑥 돈을 내어주던 엄마의 두 손, 조용히 안방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독경 소리, 불쑥 찾아와 소란을 피우던 친구들에게 내놓은 엄마의 밥상. 그 어느 것에도 보물 같은 엄마의 너그러움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 집은 가족을 따뜻하게 재워주거나 덥혀주는 집 이상의 것이었다. 입시에서 낙방해도 우리 마음을 포근하게 하여 사막 같은 세상에서 희망을 보게 하는 엄마의 집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생텍쥐페리의 편지에는 오랫동안 보지 못하면 일어나는 엄마에 대한 서글픔과 추억이 이렇게 쓰여 있다.

 

“엄마! 엄마는 막 꿈나라로 가려던 어린 천사들에게 몸을 숙여 우리 여행이 편하고, 그 어느 것도 우리 꿈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구겨진 침대 시트를 펴주고 눈앞에 아른거리던 그림자와 넘실대는 파도를 없애주셨지요. 마치 신의 손길이 바다를 잠재우듯 말이죠.”

오랜 시간 사막에서 살고 사막을 날던 『어린 왕자』의 생텍쥐페리에게는 사막이 곧 집이었다. 집이건, 별이건, 사막이건 그것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모두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보이지 않는 집의 아름다움은 사막에서 죽어가던 그에게 풍요로움을 제공하였다. 죽음과 대면한 고독과 기아와 갈증에도 불구하고 집은 살아서 귀환해야 하는 희망의 샘이었다.

생텍쥐페리는 네 살 무렵 아버지를 여윈 후 할머니, 이모, 누이 그리고 엄마 등 주로 여인들에 의해 길러졌는데 그 가운데 엄마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까닭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시기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여운이 그의 데생들에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총명하고 친절한 사람은 엄마였다. 생텍쥐페리는 죽음을 마주하고 어린 왕자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어린 시절 집이 풍기는 신비로움이 곧 엄마의 포근한 마음에서 유래함을 깨달은 것이다.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의 집은 관세음보살 같은 엄마의 마음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