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택쥐페리의 비행의 진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1944년 7월 31일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종 비행기 정찰을 자원한 마흔 네 살의 어린아이 생텍쥐페리는 미국산 쌍발기 ‘P-38 라이트닝’을 몰고 가다 그의 소설을 읽으며 비행사의 꿈을 키운 독일 비행사 호르스트 리페르트의 사격으로 지중해 속으로 추락한다. 생텍쥐페리는 비행의 사고 위험성 때문에 약혼자 루이즈 드 빌모랭과 그 집안으로부터 파혼당했고, 부인 콘수엘로 순신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행을 계속하여 주위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하다 결국 동료들이 우려하던 대로 마지막 비행에서 격추당하고 못하고 만다.
『어린 왕자』의 전편 『사람들의 땅』에는 소설 속 인물이자 실제 생텍쥐페리의 동료인 메르모즈가 등장한다. 그가 한겨울 안데스 산맥에 불시착하여 사경을 뚫고 귀환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생텍쥐페리가 생각하던 비행의 진실이 잘 드러나 있다. 모진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칠레 쪽 안데스 산맥 경사면을 기어 내려오는 메르모즈의 모습을 회고하면서 생텍쥐페리는 우리에게 말한다. 누군가 우편 비행사가 편지 한 장에 목숨을 걸만한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면 메르모즈는 당신을 크게 비웃었을 것이라고. 그에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편지는 매우 중요한 것이며, 진실이란 이 편지를 싣고 비행사가 안데스 산맥을 넘을 때에 자신 안에서 탄생한 인간이라고. 그에게 진실은 새롭게 태어난 인간인 것이다.
생텍쥐페리에게 진실이란 다른 사람을 위해 새롭게 태어나는 개인 즉 부활한 ‘인간’이다. 메르모즈는 안데스에서 조난을 당해 얼어 죽게 될 위기에 처한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부인을 위해 남의 눈에 띄는 곳에서 죽을 생각을 하고 눈에 잘 띄는 양지바른 곳으로 사력을 다해 이동한다. 실종자 가족에겐 보험료가 늦게 지급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구조대가 자신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계속 이동하다 결국 안데스산맥을 넘어 생환의 신화를 남겼다. 실종자 가족에겐 보험료 지급이 수년 걸리지만 남의 눈에 발견되어 사망 판정을 받으면 보험료가 바로 지급되기에 부인을 위해 자신의 시신이 보이는 곳에서 죽을 생각을 한 순간 메르모즈의 진실이 태어난 것이다. 진실이란 있느냐 혹은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타적 보살행에 따른 결과이다. “나는 남을 위해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중요하지, 진실의 있고 없음에 대한 물음은 허무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생텍쥐페리에게 그런 논증의 문제는 쓸데없는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이런저런 다른 것들 모두 차치하고, 그 종교, 그 문화, 그 가치 규모, 어린 왕자가 자기 자신 속의 낯선 군주를 놓아버리고 떠나듯 그 행동거지가 그 사람에게 충만감을 부여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 가치 규모, 그 문화, 그 행동거지가 그 사람의 진실이 된다.
그러나 진실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진실과 함께 함에도 진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 깨달음을 포기하고 성스러운 직업에 종사하며 욕심을 버릴 때, 어둠의 심연에 떨어졌다고 여길 때 평화가 찾아오고 비로소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저 자신의 친구로서 고독을 맞이하게 된다. 도시에서 수 천리 떨어진 사막 복판에 불시착하여 한밤중에 깊은 고독을 느끼면서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친구 ‘어린 왕자’를 발견하지 않았던가. 목덜미까지 모래에 파묻혀 갈증으로 서서히 목이 죄어올 때, 사막의 별이 펼쳐 놓은 망토 아래 그토록 가슴이 뿌듯해지던 그 때 비로소 내 마음속 어린 왕자가 찾아오는 것이다.
생텍쥐페리는 묻는다. “미지의 상황들만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 외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진실은 과연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생텍쥐페리는 전업 작가가 아니다. 그는 비행사로서 인간의 근심을 알고 있다. 비행사는 바람과 별들과 밤과 모래와 바다를 상대한다. 그는 자연의 힘에 맞서 계략을 짠다. 겨울의 정원사가 봄을 고대하듯 비행사는 새벽을 고대한다. 그는 ‘약속의 땅’을 고대하듯 착륙장을 고대한다. 그리고 별들 속에서 진실을 찾았다. 그리하여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소설 『사람들의 땅』의 영어판 제목을 바람, 모래 그리고 별들 Wind, Sand and Stars이라고 명명한다.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다를 바 없다. 생텍쥐페리와 윤동주 모두 어둠으로서의 밤을 노래할 뿐이다. 생텍쥐페리 역시 진실을 조건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인이다.
그는 비행 영역에 살았다. 마치 수행자처럼 자신을 덮고 있는 어두운 밤에 맞이하는 적막한 어둠을 느끼면서 살았다. 구원을 줄 수도 없는 명상 속에서 본질적인 의식의 은밀함 속에 자신을 가두는 사원에서의 어둠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생텍쥐페리의 문학적 영광만을 들추어내며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한 듯 논문을 쓰고 지식을 뽐낸다. 그의 글은 지식소매상들을 위한 글이 아니다. 에드가 포, 보들레르, 랭보처럼 생텍쥐페리는 어둠을 노래한다. 그의 이야기는 모두 밤의 찬가들이다. 시간적인 밤이 아닌 노자가 말하는 “현지우현 玄之又玄” 즉 어둠의 심연에 다다르기 위한 직업의 혹독함에 대한 산문시이다. 직업을 통한 연대감에 의해서만 인간은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생텍쥐페리는 사람들의 땅을 관념적으로 인식하는 현대인들을 위해 다시 『어린왕자』를 쓰면서 어둠 속에서만 볼 수 있는 별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호의 「별이 빛나는 밤」처럼 생텍쥐페리는 우리에게 ‘어둠 속으로!’라고 조용히 울부짖는다. 마치 우리에게 어둠 속으로 들어갈 신성한 야만이 남아 있다는 기대 속의 외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