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our < lat. amor <eros(ἔρως érôs)>

플라톤은 대화 <향연 le Banquet>에서 전생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원초적 양성의 존재가 모든 것을 완비한 채 신들과 겨루고 있었는데 제우스가 이를 분리하여 나머지 다른 한 쪽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불완전한 두 존재를 창조해 냈다. 사랑의 신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스토아학파들은 세네카처럼 사랑을 정신적 질병으로 묘사하였다. 聖아우구스티누는 “나는 쓰라리게 사랑했었네”라고 고백하였으며, 아빌라의 성녀 테레즈 Sainte-Thérèse d‘Avilla)는 “나는 이미 나를 벗어나 살고 있네, 사랑 때문에 죽어가고 있으므로”라고 사랑의 고통을 묘사하였다. 보들레르는 사랑의 본질을 고통에서 찾고, 사랑의 유일하고 지고한 쾌락이 고통을 준다는 확신에 있으며, 쾌락 모두는 고통 속에만 있음을 남녀노소 모두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다고 자신의 내면일기인 「불화살」에서 밝힌 바 있다. 이후 랭보와 말라르메, 초현실주의와 바타유에 이르기까지 사랑은 인류의 행복과 평화에 필수적인 종교와 예술의 근원으로 규정되고 있다. 블랑쇼의 말을 빌면 “같은 하나의 것을 말하는 사람” 사이처럼 상대의 한계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사랑에 관심을 가진 철학자로 레비나스와 바디우를 들 수 있다.

바디우에게 사랑은 하나의 사유이며(···) 사유와 몸 사이의 관계는 아주 특이하며, 필연적인 어떤 폭력으로 늘 각인되어 있다. 우리는 삶에서 이러한 폭력을 경험합니다. 사랑이 우리의 몸을 복종하게 만들고 거대한 고통을 유발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달리 레비나스에게 사랑은 언어와 더불어 타자와 관계할 수 있는 방식이다. 사랑은 욕망과 현실의 요구와 쾌락의 대상으로 소유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여인과의 관계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분석은 타자와의 관계가 사랑의 이중성을 통해 생산성으로 완성되며, 생산성을 통해 미래와 시간이 다시 새롭게 출현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앙드레기고는 “사랑에 관한 사색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괜한 시간 낭비가 아닌가? 천만에, 사실은 정반대다. 사랑을 해보면 사유의 가치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언제 사유를 해도 늦지 않는 것처럼 사랑 또한 언제 해도 늦지 않다. 진실한 사랑, 사랑의 열정에 빠진 사람의 사랑은 사유로 인해 풍요로워진다.”(『사랑의 철학 Petite Philosophie de la Passion Amoureuse』(김병욱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