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티슴의 이해를 돕는 용어들

Non-Moi FORUM 2015.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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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로티슴의 의의, 라스코(예술의 탄생)

생식을 목적으로 하는 동물의 교미와는 달리 의식적으로 쾌감을 목적으로 하는 성적 결합을 의미하며, 시, 예술, 종교와 마찬가지로 수단이 아니라 절대적 목적이자 조건 없는 욕망이다. 조르쥬 바타유(Georges Bataille)는 이를 ‘저주 받은 몫’으로 정의한다. 에로티슴은 단순한 성에 관한 담론이 아니라 종교와 예술의 토대이며, 상식과 인습을 넘어 금기에 저항하는 모든 비생산적 소비 즉 종교와 예술을 비롯한 인간적 가치의 전제 조건으로 작용한다.

하나의 예, 라스코 동굴 벽화) 자신을 사냥한 ‘새-인간’(Bird-Man)을 들이받으며 내장을 쏟으며 죽어가는 들소. 폭력의 유혹으로서의 죽음의 대가를 치루며 성기를 고추 세우고 죽은 ‘새-인간’. 고대 동굴 벽화에 새겨진 영적인 동물에 대한 속죄 의식으로서의 이 그림은 공동체를 위한 희생으로서의 죽음을 통해, 동물들과 네안데르탈인이 아직 깨닫지 못한 에로티슴에 대한 성찰-공포와 황홀감 간의 본질적인 상응성-을 보여준다. 즉 인간은 서로를 위해 스스로 발가벗은 알몸과 알몸이 결합하며 서로의 ‘작은 죽음’을 통해 나의 남의 경계를 소멸시키며 공동체로서의 합일에 이른다. 곧 절정의 순간의 ‘작은 죽음’ 너머로 열리는 지속적인 생명에 이르는 길이 에로티슴인 것이다.

2. 에로티슴의 조건, 非我mon-moi(예술가의 고통)

칼 마르크스가 자아를 개체를 떠나 계급적으로 본 것이나, 프로이트가 자아를 무의식을 통해 본 것은, 자아의 인식불가능성을 주장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의 말처럼 인간이 자의식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과 동일선 상에 있다. 동시대의 시인 샤를르 보들레르 또한 이러한 자아와 비아를 주체와 객체의 대립으로 보는 자아 중심적 사유 태도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자아 속에서 추구해야 할 또 다른 자아로 ‘non-moi내가 아닌 나’를 역설한다. 이 자아는 하나의 자아이자 곧 다수이며, ‘non-moi’는 다수와 맺는 무수한 관계 속에서 발견하는 자아로 본 것이다.

3. 에로티슴의 자세, 탈자아脫自我(예술가의 목표)

예술가들은 ‘non-moi’로서의 완성을 추구하며, 아름다움은 마치 ‘non-moi’의 성격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아름다움은 관조나 단순한 느낌의 측면에 국한되지 않고, 자아상실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4. 에로티슴의 실천, 惡(예술의 표현 대상)

이미지의 시대에서 텍스트의 시대로 바뀐 불행한 르네상스 시기의 회화들, 원죄 개념이 퇴색한 계몽주의 시기의 사드 후작의 소설, 19세기 보들레르의 『惡의 꽃』 같은 시들은 어둠 속에서만 빛의 추구가 가능함을 알리듯, 악을 선의 전제 조건으로 자리매김하고 악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에 이른다. 조르쥬 바타유는 『문학과 악La littérture et le Mal』을 통해 문학을 악의 표현으로 상정한다.

5. ‘농무아non-moi’의 성격, 아름다움(예술가의 자세)

아름다움은 우선적으로 자기 마음 상실에 관계되는 문제이며, 자기완성의 태도로서 ‘non-moi’의 성격과 같다. 그러기에 아름다움은 추함의 반대어로 관조나 단순한 느낌의 측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추함을 전제로 자아 상실을 요구하는 악의 힘의 측면에서 고찰되기에 이른다. 신비로움과 비규칙성, 다시 말해 예기치 못한 것, 뜻밖의 것, 놀라움이 아름다움의 성격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미셸 푸코는 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인의 마음 자세를 에토스(éthos)라 부르며 아름다움의 계기로 상정한다. 이러한 관점은 진정한 예술이란 아름다움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관습화 된 아름다움이 지니는 일종의 관습화된 권위 속에 내포된 오류를 지적하는 것* 예를 들어 문학, 음악, 회화, 철학에 관한 학자들의 관습화된 권위적 해설

이라는 조르쥬 바타유의 심미적 특성과도 일맥상통한다.

에로티슴의 이해를 돕는 용어들

Non-Moi FORUM 2015.02.04

1. 에로티슴의 의의, 라스코(예술의 탄생)
생식을 목적으로 하는 동물의 교미와는 달리 의식적으로 쾌감을 목적으로 하는 성적 결합을 의미하며, 시, 예술, 종교와 마찬가지로 수단이 아니라 절대적 목적이자 조건 없는 욕망이다. 조르쥬 바타유(Georges Bataille)는 이를 ‘저주 받은 몫’으로 정의한다. 에로티슴은 단순한 성에 관한 담론이 아니라 종교와 예술의 토대이며, 상식과 인습을 넘어 금기에 저항하는 모든 비생산적 소비 즉 종교와 예술을 비롯한 인간적 가치의 전제 조건으로 작용한다.
하나의 예, 라스코 동굴 벽화) 자신을 사냥한 ‘새-인간’(Bird-Man)을 들이받으며 내장을 쏟으며 죽어가는 들소. 폭력의 유혹으로서의 죽음의 대가를 치루며 성기를 고추 세우고 죽은 ‘새-인간’. 고대 동굴 벽화에 새겨진 영적인 동물에 대한 속죄 의식으로서의 이 그림은 공동체를 위한 희생으로서의 죽음을 통해, 동물들과 네안데르탈인이 아직 깨닫지 못한 에로티슴에 대한 성찰-공포와 황홀감 간의 본질적인 상응성-을 보여준다. 즉 인간은 서로를 위해 스스로 발가벗은 알몸과 알몸이 결합하며 서로의 ‘작은 죽음’을 통해 나의 남의 경계를 소멸시키며 공동체로서의 합일에 이른다. 곧 절정의 순간의 ‘작은 죽음’ 너머로 열리는 지속적인 생명에 이르는 길이 에로티슴인 것이다.

2. 에로티슴의 조건, 非我mon-moi(예술가의 고통)
칼 마르크스가 자아를 개체를 떠나 계급적으로 본 것이나, 프로이트가 자아를 무의식을 통해 본 것은, 자아의 인식불가능성을 주장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의 말처럼 인간이 자의식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과 동일선 상에 있다. 동시대의 시인 샤를르 보들레르 또한 이러한 자아와 비아를 주체와 객체의 대립으로 보는 자아 중심적 사유 태도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자아 속에서 추구해야 할 또 다른 자아로 ‘non-moi내가 아닌 나’를 역설한다. 이 자아는 하나의 자아이자 곧 다수이며, ‘non-moi’는 다수와 맺는 무수한 관계 속에서 발견하는 자아로 본 것이다.

3. 에로티슴의 자세, 탈자아脫自我(예술가의 목표)
예술가들은 ‘non-moi’로서의 완성을 추구하며, 아름다움은 마치 ‘non-moi’의 성격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아름다움은 관조나 단순한 느낌의 측면에 국한되지 않고, 자아상실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4. 에로티슴의 실천, 惡(예술의 표현 대상)
이미지의 시대에서 텍스트의 시대로 바뀐 불행한 르네상스 시기의 회화들, 원죄 개념이 퇴색한 계몽주의 시기의 사드 후작의 소설, 19세기 보들레르의 『惡의 꽃』 같은 시들은 어둠 속에서만 빛의 추구가 가능함을 알리듯, 악을 선의 전제 조건으로 자리매김하고 악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에 이른다. 조르쥬 바타유는 『문학과 악La littérture et le Mal』을 통해 문학을 악의 표현으로 상정한다.

5. ‘농무아non-moi’의 성격, 아름다움(예술가의 자세)
아름다움은 우선적으로 자기 마음 상실에 관계되는 문제이며, 자기완성의 태도로서 ‘non-moi’의 성격과 같다. 그러기에 아름다움은 추함의 반대어로 관조나 단순한 느낌의 측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추함을 전제로 자아 상실을 요구하는 악의 힘의 측면에서 고찰되기에 이른다. 신비로움과 비규칙성, 다시 말해 예기치 못한 것, 뜻밖의 것, 놀라움이 아름다움의 성격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미셸 푸코는 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인의 마음 자세를 에토스(éthos)라 부르며 아름다움의 계기로 상정한다. 이러한 관점은 진정한 예술이란 아름다움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관습화 된 아름다움이 지니는 일종의 관습화된 권위 속에 내포된 오류를 지적하는 것* 예를 들어 문학, 음악, 회화, 철학에 관한 학자들의 관습화된 권위적 해설
이라는 조르쥬 바타유의 심미적 특성과도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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