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영화

송태효(고려대학교 레토릭연구소)

서두, 불교 교리와 영화

우리는 누구나 극장의 어둠 속에서 영화를 감상한 경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매표소에서 관람료를 지불하고 티켓을 끊어 극장 속 어두컴컴한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으면 서서히 어둠이 깔리며 영화가 시작됩니다. 이 어둠 속에서 우리는 마치 어떤 미지의 세계를 함께 나누기라도 하듯, 때로는 근심어린 눈빛으로, 때로는 안도의 눈빛으로, 때로는 초조한 눈빛으로, 때로는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때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때로는 당혹해 하는 눈빛으로 마치 한 생명의 이야기인 양 생생한 한 편의 이야기가 굴곡을 그리며 씌어지는 과정을 함께 지켜보게 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영화를 바라보는 이 눈길들은 극장 밖의 세속에 대한 눈길과는 달리 긴장하고 있습니다. 영사기가 뿜어내는 빛줄기 따라 어둠을 뚫고 스크린에 영사되는 황홀한 장면들을 따라, 일상의 번뇌에서 벗어나 내 자신을 잃은 채 영화에 매료되는 것입니다. 감상의 대상으로서의 영화는 이렇게 나 자신을 버리고 긴장된 시선으로 제법실상을 대하라고 말하기라도 하듯 우리를 무아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렇게 여법하게 실상을 대하는 자세를 가르쳐주는 데 머물지 않고, 불법이 전하는 여러 가지 깨우침의 내용을 스스로 전하고 있기도 합니다.

붓다가 선정에 들어선지 7일 만에 깨달은 연기법은 무엇인가요?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음을 가르쳐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카메라가 있기에 배우가 있고, 배우가 있기에 이들을 지시하는 감독이 있습니다. 영화의 장면들 역시 이 장면이 있기에 저 장면이 있고, 저 장면이 사라지면 이 장면도 사라짐을 말해줍니다. 움직이는 그림들로서의 영화는 만약 그 움직임 속에서 어느 한 장면이라도 끊어져버리면 곧 그 생명을 상실하고 말지요.

붓다가 설한 바른 길이란 극단을 피하는 중도입니다. 쉽게 말해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인데, 영화는 있음-없음의 두 극단에서 벗어나 각 장면들이 공존함을 보여줍니다. 어두운 극장 속에는 빛이 있는 것인가요, 없는 것인가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지요. 마치 성과 속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것(不一不二)과 마찬 가지입니다. 인연법에 기초하여 붓다께서 설하신 삼라만상의 특징을 삼법인이라고 합니다. 도장 인(印)자라고 씀은 언제나 도장 찍듯 다르지 않음을 말함입니다.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가르침처럼 영화의 장면들 역시 잠시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각 장면은 저마다의 실체성을 지니지 않습니다. 또한 고에서 벗어나기 위한 팔정도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즉 정견으로부터 시작하지요. 영화 역시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의 잣대를 들이 대면 제대로 볼 수 없기에 아상을 버리고 감상해야 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세상 모든 현상계를 평등하게 두루 비추는 달처럼 영화도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좀 더 상세하게 그 연관관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연기설과 영화

영화 제작 과정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선 기획자가 영화를 기획하고 시나리오 작가 혹은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의뢰합니다. 시나리오가 어느 정도 완성되면 제작자들을 물색하고 배우들 선정 작업에 들어갑니다(캐스팅). 이와 동시에 촬영지를 물색하는 연출부, 그곳을 촬영할 카메라 팀의 헌팅 작업(촬영지 탐사)도 진행되지요. 촬영 시나리오인 콘티뉴티가 마무리되고 운이 좋아 배우 선정도 이루어져 촬영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하지만 마케팅 과정에서 예상 밖의 자금이 필요하게 되나 추가 자금을 더 이상 구하지 못해 녹음과 편집 등 마무리 작업이 중단되고 스태프들은 예전에 계약해 놓은 일정에 따라 다른 촬영장으로 떠나야 할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외에도 촬영과정에서 일어나는 돌발 상황은 무수히 많습니다. 심한 경우 영화계에서는 ‘엎어졌다’는 표현을 쓰는 상황에 이르기도 합니다. 영화 제작과정에서 어느 작업 하나 독자성을 확보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조화 속에서만 자신의 가치를 발휘합니다. 최민식 씨의 가치가 경제적인 관점에서 남보다 우월할지는 몰라도 그 분의 수백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급료를 받는 소품 기사 역시 영화 현장의 가치 면에서는 동등한 가치를 지닙니다. 제작과정에서 돈도 중요하지만 사람 하나. 기계 하나가 모여 맺어내는 관계, 공존의 관계야 말로 영화의 존재인 것입니다. 공존의 세계관으로서의 연기법을 알고 있는 불자 영화인들, 사소한 일이 일으키는 그 결과의 중대성을 예의주시하는 불자 영화인의 태도는 영화작업 현장에서 그만큼 존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그림으로서의 영화 장면 하나하나는 이 연기법의 공생관계를 그 무엇보다 잘 대변합니다. 문장에서의 단어에 버금가는, 영화의 최소 기본 단위 쇼트shot, 이 쇼트들이 이루는 신scene, 신들이 이루는 시퀀스sequence. 시퀀스들이 이루어 내는 영화 한 편. 대게 하나의 시퀀스는 10분 분량이며, 24개의 시퀜스들이 영화 한편을 구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화는 수많은 쇼트의 장면들로 구성된 필름 덩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덩어리들을 하나로 묶은 영화 속에서는, 이 장면이 있기에 저 장면이 있고, 저 장면이 사라지면 이 장면도 사라집니다. 장면들 하나하나는 각각 앞뒤의 장면들이 있기에 그 흐름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의 가치를 누립니다. 만약 한 장면이 끊어져 버린다면 영화의 흐름 전체가 끊기게 되어 여타 어떠한 장면도 볼 수 없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영화에서도 연기의 법칙은 영화 존재 원리로 작용합니다.

 

2. 삼법인과 영화

붓다의 깨달음의 요지는 이 연기설에 있습니다. 무명으로부터 비롯하는 12연기설이야말로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 불교의 가르침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불교 특유의 현대적 요소입니다. 현상적 사물 즉 유위는 모두 인과 연에 따라 생긴다고 보는 이 연기설에 기초하여 붓다는 삼라만상의 진실로서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를 설하였습니다. 붓다가 발견한 ‘법인(dharma mudra)’은 법의 표지라는 뜻으로 붓다의 출현과 관계없이 변하지 않는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제행무상인, 제법무아인, 일체개고인’으로 풀이되기도 하고, 논리적인 연관관계에서 무상과 무아에 이미 고가 포함되기 때문에 일체개고인을 열반적정인으로 대체하여 ‘제행무상인, 제법무아인, 열반적정인’으로 풀이하기도 합니다.

현상계 가운데 삼법인의 내용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없듯이, 영화에 있어서도 이 삼법인은 그대로 적용됩니다. 삼법인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면 영화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요. 이 가운데 인연들이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생멸현상을 설명하는 化身으로서의 제행무상은, 카메라로 찍고 편집실에서 잘라 붙이는 작업 즉 영화 촬영 및 편집의 특성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인연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연기의 근본도리를 설명하는 응신으로서의 제법무아는 영화의 구성요소로서의 개개의 장면을 이루는 낱장의 사진들이 지니는 특성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열반적정인은 마음 즉 법신으로서 연기나 인연처럼 외연에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훌륭한 예술가들의 근본 자세를 나타내는 표현들 ― 나로부터의 벗어남, 해탈, 극기 및 탈자아적인 노력 ― 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중심으로 논의하고, 열반적정의 태도에 관한 논의는 결론 부분에서 간략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1) 제행무상으로서의 스크린

제행무상인과 영화는 어떠한 연관성을 지닐까요. ‘諸行(sarva samskara)`의 ‘제(諸, sarva)’는 ‘일체’를 뜻합니다. ‘행(行, samkara)’은 ‘함께’라는 의미의 접두사 ‘sam’과 ‘하다, 만들다’라는 동사 ‘kṛ’의 합성어로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제행이란 일체의 만들어진 것, 다시 말해 물질적, 정신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의미합니다(유위법). 일상적으로 표현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역시 이 현상의 일부이기에 이 법칙으로부터 예외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영화는 어떤 면에서 더욱 바람직한 예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영화는 그 무엇보다도 정신과 물질, 시간과 공간, 개인과 우리, 순간과 지속 등 복잡한 우리 생활의 현상이 한 데 어울린 가장 복잡한 장르이기 때문인데, 이러한 영화적 요소들 역시 붓다가 설한 삼법인의 가르침대로 무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무상의 의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無常’은 anitya의 번역어로서, nitya(恒常)의 대립어입니다. 무상이란 글자 그대로 ‘늘 그렇지 없다, 항상 함이 없다, 변화하고 변천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제행무상‘이란 모든 존재가 항상 함이 없이 늘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하지요. 모든 것이 늘 변화하고 있음은, 헤라클레이토스의 표현을 따르자면 곧 모든 것이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흘러가고 있음을 말합니다. 사진이나 회화와 달리 영화에는 고정된 장면이 하나도 없습니다. 영화의 장면들은 영사기가 돌아가는 한, 다시 말해 영화가 상영되는 한 계속 흘러가고 있습니다. 삼라만상의 느린 변화를 인간이 감지 못하기도 하지만, 급속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영화 속 사진의 흐름 역시 눈으로 식별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의 시각으로는 감지 할 수 없는 빠른 속도인 초당 24장의 사진(frame)이 흘러 급속한 변화가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신성일 씨가 전혀 움직이지 앉고 가만히 앉아 있는 장면을 우리가 보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수심에 가득 찬 그가 1분가량 고개를 떨어뜨린 채 앉아 있는 장면의 경우 사진이 몇 장이나 흘러갔을까요. 1초에 24장이 흘러가니, 1분이면 24×60=1440장의 사진이 흘러가버린 것입니다. 심지어 어느 병원 장례식장의 상가 장면에서 움직이지 않는 고인의 영정을 5초 동안 비추는 동안에도 그 동안 약 24×5=70장의 사진이 흘러간 것입니다. 고정된 신문 기사를 보여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는 듯하지만,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영사기의 릴에서 돌아가며 렌즈를 통해 투영되는 사진은 영사기의 어느 고정된 부분에 머무는 경우가 없으며, 반대편 스크린에서도 또한 이와 같이 동일한 사진이 머물지 않습니다. 극장의 영사기와 스크린처럼 제행무상의 실상을 정확히 보여주는 일상의 예도 드물 것입니다.

이렇게 영화의 모든 장면은 다음 장면으로 흘러가 다시 시작되는 윤회의 과정입니다. 매번 영화가 끝나면 같은 필름을 다시 감아 처음부터 또 돌리고 흥행이 저조하면 결국 폐기처분되어 구두약이나 화장품 연료로 탈바꿈되어 원래의 구성성분으로 회귀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작품은 영화사적 제작 규모에 비해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아무리 기술이 발전한다 해도 이들의 영구 보관을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영화계의 경우, 영화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인 5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 제작된 영화 가운데 원본 필름(네거티브)이 보존되고 있는 경우는 극희 드문 실정이니, 영화의 무상함이야말로 바로 우리 문화계의 무상함이자, 예술의 무상이기도 합니다. 그나마 극작가 함세덕의 희곡 ‘동승’을 영화화한 윤용규 감독의 <마음의 고향>(1949), 김기영 감독의 <파계>(1972)가 남아 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

 

2) 제법무아로서의 스크린

‘제법(sarva dharma)’이란 제행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있는 것 모두를 지칭합니다. 그러니 ‘제법’과 ‘제행’은 일견 같기도 하면서 다른 말입니다. ‘제행‘의 ’행‘은 ‘samskara’이고 ‘제법’에서 ‘법’은 ‘dharma’이니까요. 같은 말이건 서로 다른 말이건,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무아’의 의미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제법이 제행보다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만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무아(anatman)’는 ‘나는 없다’ 혹은 ’나 아닌 나 非我’를 의미합니다. 붓다 이전에는 생멸변화를 벗어난 영원하고 불멸적인 존재 ‘아트만atman’을 인정하고 브라만과 아트만의 일치를 수행의 궁극의 목적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즉 실체로서의 개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이들은 주체를 인정하는 윤회 즉 유아윤회설을 주장하였는데, 이와 정반대로 붓다는 아트만을 부정하고 무아윤회설을 창시하기에 이릅니다. 따라서 제법무아는 모든 존재에는 고정 불변하는 실체, ‘나’로서의 실체 즉 자성(自性)이 없음을 뜻합니다. 살아서도 ‘나’라는 절대적 존재가 없고, 죽어 다시 태어나도 ‘나’의 고정된 존재는 없으며, 그 어느 것도 그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법이기에, 생각과 행동에 ‘나’가 없다는 것이, 도에 이르는 진실로서의 제법무아의 내용인 것입니다.

영화 하나 하나의 장면들에도 역시 자성이 없습니다. 한 장면은 절대적 의미나 내용을 지니지 않습니다. 한편의 영화는 수많은 움직이지 않는 단편 사진들 즉 프레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진작가가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은 작품 한 장 한 장마다 독립적이며 개별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영화 카메라가 찍어 놓은 수많은 사진들 하나하나는 사진 작품들과는 달리 개별적으로 독립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오직 이들을 편집하여 서로 이어 놓고 영사할 때 그 흐름 속에서만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즉 사진과 달리 영화의 이미지들에는 주체적인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영화는 이런 면에서 물질의 공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예술 장르이지요. 훌륭한 영화의 경우 가장 짧은 단위로서의 영화의 쇼트들은 결코 독립적이고 규정된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다만 앞뒤 쇼트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영화는 있습니다. 그것도 영화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낱장들의 사진들의 관계 그리고 사운드의 흐름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과의 관계만 있습니다. 영화를 찍고도 상영하지 못하면 영화는 그 의미가 없지요. 색수상행식이라는 오온에 지나지 않는 나처럼 실체가 없이 이미지와 사운드의 덩어리로 존재하는 것이 영화인 것입니다.

한 편, 붓다의 가르침을 핵심적으로 드러내는 표현 가운데 대표적인 구절은 아마도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일 것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영화 속 낱장의 사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물질인 것은 공성(空性)이며, 공성인 것은 물질입니다. 느낌과 생각과 의지와 마음 즉 오온도 바로 이와 같아, 삼라만상 자체에 실성은 없으며 있는 것은 오직 공성이니 물질은 공성이고 공성이 바로 물질인 것입니다. 만물에는 자성이 없으며, ‘나’와 같은 영화 속 낱장의 사진 역시 그러합니다. 다섯 가지 오온, 더 나아가 나를 포함한 만물의 공성의 모습 혹은 특징들은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부족하지도 충분하지도 않습니다. 사진 낱장 자체도 그러합니다. 나아가 공성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도 없으며, 생각도 없고, 의지도 없으며,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공성은 결국 연기를 의미하니 결국 ‘나’라는 것은 인연 법칙에 따라 그때그때 드러나는 ‘색’에 지나지 않으며 절대적 가치나 의미를 지니지 않듯이, 영화의 이미지 하나하나에도 이와 같은 공성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3. 윤회와 영화

영화는 순간순간 영사기가 뿜어내는 빛과 그 빛이 차단되는 어둠 속에서 생멸의 윤회를 반복합니다. 움직이지 않으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들을 바라보면서 때로는 그 우스꽝스러움에 웃음을 터트리며,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슬며시 감동에 젖어들기도 하지만 영화 속 장면들은 실제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 이미지는 본래 부동입니다. 그런데 영화의 움직임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영화의 움직임 장면은 규칙적으로 깜박이는 영사기의 렘프 효과 그리고 그것이 빚어내는 네온사인 효과에 의한 기계 조작 효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1초에 24프레임이라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영화에서, 하나의 프레임이 영사기의 렌즈를 통해 스크린에 영사될 때 영사기는 이동을 멈추고 정지합니다. 그리고 다음 프레임으로 넘어가는 동안 영사기 램프는 꺼지고 다음 프레임이 렌즈와 일치하게 되면 다시 빛이 비칩니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극장 안에서는 매 1초 동안 24번 빛과 어둠이 교차합니다. 상영시간 90분짜리 영화를 한 편 보고 나왔다면 적어도 스크린에서 30분은 시커먼 어둠만 보고 나온 것이지요. 하지만 대부분 90분 전체를 영화를 보고 나온 것으로 착각합니다. 너무 빠른 빛과 어둠의 교차 사이에서 빛을 받은 장면만을 인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의 반복인 윤회 속에서 삶만 중요시 하는 것은 극장에서 90분 내내 빛만 바라보고 나온다고 여기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윤회의 주체라 여기는 사람이 정작 자신의 삶의 실체를 인식하지 못하듯, 극장마다 돌아가며 매번 다시 상영되는 영화 자신도 정작 돌고 도는 영화 상영 사실 자체를 알 수 없습니다.

 

4. 중도와 영화

또한 이미지를 담은 필름은, 있음-없음(有無)에 집착하는 현대인에게 중도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는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팔종(八宗)의 조사 용수(龍樹, Nāgārjuna)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