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성의 미학: 로베르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라프에 관한 노트』를 중심으로

 

송 태 효

고려대학교

 

〔국문요약〕

장엄하면서도 간결한 단상을 담고 있는 브레송의『시네마토그라프에 관한 노트』는 생동적인 미지의 체험으로 우리를 이끄는 시인의 간결한 언어처럼 단순성의 미학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단순성의 미학은 통일성과 경제성에 의거하여 사실주의 정신과 정확한 방법론을 추구하며 거창하고 막연한 주제를 지양한다. 구체적 경험에서 유래한 단순성이 시네마토그라프의 주제를 승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브레송은 자신만의 진정한 체계를 표명하기 위해 단순한 언어, 단순한 감정, 단순한 생각을 사용한다. 이렇게 브레송은 증언의 언어로서 시네마토그라프를 통해 예술적 사실성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단순성에 의거한 각각의 이미지의 사실성이 스스로 독자적 가치나 생명력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이미지와 이미지들의 관계, 소리와 소리의 관계. 이미지와 소리의 관계를 통해서만 그 존재가치를 지닌다. 관계맺음을 통해 가능성으로서의 영화가 그 현존하게 되며, 생명이 자연스러운 것이듯 그 관계 역시 의도적이기 보다 자연발생적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미지들의 관계를 맺어주는 방법의 정확성이 필요하며, 이 정확함에서 영화의 생동감이 탄생한다. 따라서 이미지와 소리의 흐름은 논리적 조작을 떠나 있는 그대로의 현실성에 의거해야 한다. 논리적 방법에 의거하여 느낌을 분석하고 조립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은, 예술의 출발점으로서의 느낌 역시 자동 발생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의 느낌을. 유사한 이미지들과 동등한 소리들로 분명하게 전하는 확실한 시네마토그라프적 방법이 필요하게 되는데, 그 방법이란 다름 아니라 바로 일상의 자동적 몸짓과 목소리를 사용하는 단순한 방법인 것이다. 그렇게 시네마토그라프의 이미지의 생동감은 자동성에 의거해서만 실제성을 지니게 된다.

단순함의 포착으로부터 광활함으로 열리는 이미지 미학의 가능성을 펼쳐 보이는 시네마토그라프에 관한 그의 단상들은, 시와 철학, 희곡과 회화가 보여줄 수 없는 정지된 순간의 흐름을 영사기가 보여줄 것을 요구하면서, 사유 면에서 지금 이 순간도 끊임없이 복잡하고 난해해져만 가는 예술 세계를 향해 단순성으로의 회귀를 제안하고 있다.

〔브레송/시네마토그라프/단순성/관계/사실성/자발성/자동성〕

 

Ⅰ. 브레송의 이미지-시학의 원칙: 단순성

 

어느 순박한 시골 소매치기의 ‘내가 아닌 존재 non-moi’로의 여정을 일기 형식으로 그린『소매치기 Plckpocket』(1959), 은폐된 진실과 위악의 희생물로 스러져가는 젊은 순례자의 고뇌를 옮긴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Le Journal d’un Curé de Campagne』(1960), 의도적으로 세 명의 동방박사 가운데 한 명의 이름을 가진 당나귀의 시선을 빌린 『당나귀 발타자르 Au Hasard Balthazar』(1966), 거짓과 기만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자신도 모르게 점차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한 말 없는 소녀의 이야기 『무셰트 Mouchette』(1967), 아서 왕의 원탁의 기사 가운데 신의와 종교성이 가장 두드러진 인물인 랑슬로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호수의 랑슬로 Lancelot du Lac』(1974), 타인의 손을 빌어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려 드는 한 청년의 삼인칭 회고담인 『아마도 악마가 Diable probablement』(1977) 등 일련의 어둠의 연작들을 이루어 낸 로베르 브레송은 영화에 관한 장엄하면서도 간결한 단상들을 담은 『시네마토그라프에 관한 노트 Notes sur le Cinématographe』(1975. 이하 『노트』)를 남기고 있다. 생동적인 미지의 체험으로 우리를 이끄는 시인의 언어처럼 이 노트들은 브레송만의 시네마토그라프 원칙을 이루어 내고 있는데, 그것은 그 어느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이미지-시학의 단순성의 표명이다. 수 년 간 이 노트들에 담긴 함축적 의미를 숙지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홍상수의 고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화사에 이름을 남긴 감독들 가운데 그 누구도 여기에 빚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 노트들은 시네아스트들의 작품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쳐 왔다.

 

브레송의 이론적 작업은 그 창조성 외에도 독특한 체계적 특징인 평범성으로 뛰어나다. 즉 그는 그의 이론을 규정하고 배제하고 마무리한다. 즉 그가 연출하는 영화를 통해 그의 영화는 이론의 가능성과 범주를 보증해 준다. 그것이 그가 프랑스 영화에 은밀하고 심오하게 영향을 미치는 이유인 것이다. 약간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영화인 모두는 무언가를 브레송에게 빚지고 있다는 전제가 나온다.

 

실제로 브레송 영화 역시 특별한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그의 영화의 특이함은 어느 한 장면의 특별함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이미지들이 맺어내는 특이한 관계에서 비롯한다. 이미지의 근원인 현실 자체가 일상적이며, “궁극적으로 가장 생명력을 지니는 것은 가장 평범하고 또 가장 빛나지 않는 부분들”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치 제자리에 놓인 평범한 한 마디 말이 시가 되듯이, 『노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그 정확한 위치를 찾으며 빛을 발하고 있다.

문학과 연극의 요소를 벗어나지 못한 ‘시네마 cinéma’로서의 ‘예술 시네마 cinéma d’art’ 혹은 ‘예술 영화 film d’art’의 복잡한 플롯을 지양하고, 시네마토그라프로서의 영화 본연의 독자성을 추구하는 브레송의 간결한 단상들은, ‘통일성 unité’, ‘단편화 fragmantation’, ‘경제성 économie’, ‘자동성 automatisme’, 같은 영화계에서는 다소 생소하고 이질적인 용어들을 사용하며 ‘새로운 글쓰기’로서의 시네마토그라프만의 독자적이고 본질적인 세계로 우리의 사유를 인도한다. 타르콥스키가 “진정 브레송은 영화가 시, 문학, 회화와 음악 같은 고전 예술들 원칙과 동일한 수준에 있는 예술 원칙이라는 것을 보여준 예술가 가운데 한 명이다”라면서 브레송을 높이 사는 것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 이다.나아가 로버트 버드는 타르콥스키가 브레송을 그의 멘토로 부르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하기야 그 유명한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본인 스스로 감독이기도 한 콕토는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의 대사를 쓰면서 브레송으로부터 시나리오 수업을 받기도 하였는데 “이 끔찍한 이 직업에서 오직 브레송만은 예외이다”라고 토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브레송에 대한 예외적 표현들이 사실은 그의 단순성과 간결성으로 비롯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Ⅱ. 이미지-시학의 출발점: 단순성

 

장세니스트 파스칼의 단상들처럼 우리를 생동적인 어둠의 체험으로 인도하는 로베르 브레송이『노트』를 통해 시네마토그라프 글쓰기의 기본으로 제시하는 예술관의 토대는 무엇보다 풍부한 그의 독서와 예술적 안목 그리고 실제적 경험에 의거한다. 명확한 출처도 그 의도도 밝히지 않은 채 불쑥불쑥 기억에 의거하여 제시되는 구절들, 예를 들어 “자연스러움은 잃지 않은, 자연은 잃은”(샤토브리앙), “선생, 당신은 분명 얼굴을 드러내 놓고 있습죠. 그런데, 나는 몸 전체가 죄다 얼굴이라오”, “나는 종종 꽃다발을 내가 그것을 준비하지 않은 측면에서 그린다(마티스에게 보낸 르느아르의 편지)”, “우발적인 것 속에 항시적인 것, 영원한 것이 있다” 같은 존재론적 구절들은, 분명 형식 논리학 혹은 구태의연한 도식적 수사학의 경계를 넘어선 시네아스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그의 체험적 시학의 산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본질적 형이상학을 담고 있는 그의 사유는 주제 면에서 관념적 거창함과 막연함을 지양하고 단순성과 실제성을 추구하고 있다.

 

하나의 작은 주제가 복합적이고 심층적인 조합의 계기가 될 수 있다. 네가 길을 잃고 있음을 알려줄 아무것도 없는 너무 거창하거나 막연한 주제들을 피하라. 혹은, 그 주제들 가운데에서 너의 삶과 융화될 수 있고, 너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만을 택하라.

 

장세니스트적 구도의 여정에서 듣는 기도에 의한 깨달음의 울림과도 같은 『노트』의 단상들이 지니는 단순성에 대한 실천적 호소는 아무리 강조해도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을 것이다. “네가 길을 잃고 있음을 알려줄 아무것도 없는 너무 거창하거나 막연한 주제들을 피하라”는 이 정언적 명구는, 시네마토그라프 탐구에 있어 그 어떤 영역에 있어서도 피해가야 할, 영화 이미지에 담길 수 있는 사변적 관념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노트』는 그 어떤 영역에서라도 경험의 진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브레송의 언어를 마치 전제적 가설을 입증시키려는 과정을 보여주는 과학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경험의 언어로 간주할 수도 있다. 전체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 경험을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이기 힘들다. 전체는 사변의 영역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경험다운 경험은 부분적인 것을, 개별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을, 실질적인 것의 정확한 자리매김에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이 무엇인지 묻기 이전에 정확히 개인으로서의 나를 자리매김하고, 역사란 무엇인가 묻기 이전에 역사의 현존인 오늘을 정확히 자리매김하는 이들처럼 말이다. 브레송 역시 시네마토그라프의 출발점을 아주 사소한 것들, 아무도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것들의 자리매김에 두고 있다.

 

한줄기 숨결, 한순간 침묵, 한마디, 한 구절, 한바탕 소란, 손 하나, 너의 모델의 전신, 모델의 쉬고 있는 얼굴, 움직이는 얼굴, 옆얼굴, 앞모습, 하나의 광활한 조망, 하나의 한정된 공간… 각각을 정확히 제 자리에 위치시킬 것 : 너의 유일한 방법들

 

이렇게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라프 세계에서 그 이미지들의 효력은 산만함을 배제한 정확한 자리매김에 의해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며, 무엇보다도 그 토대를 단순성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순성이야말로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는 법이라는 그의 원칙은, 비단 문학과 회화의 효율성을 좌우하는 원칙일 뿐만 아니라 이미지의 창시를 지향하는 모든 형태의 예술 언어에 근간이 되는 원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과거의 위대한 예술가들의 단순성과 겸허함을 끝없이 찬미하는 브레송은 무엇보다 단순성을 이미지-시학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브레송이 추구하는 단순성의 주제는 이렇듯 경험의 출발점에 다름 아니다. 경험은 비록 그 영역이 지극히 한정적이라 할지라도 무엇보다도 사물과의 일치를 열어 보인다. 그의 작품 화면에 부풀림이 없는 것은 단지 그가 단순함을 자신의 시네마토그라프의 원칙으로 삼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원칙이 경험을 통해 실천으로 이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브레송이 주제의 단순화를 위한 단순화 자체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단순화를 통해 현대 영화계가 잃어버린 주제 의식을 되찾고자 하는 데 단순화의 의의가 있다. 주제의 단순화는 주제의 승화를 위한 것이다. 복잡하고 다양한 기술에 치중하여 현란한 이미지로 관객의 사유를 마비시키는 동시대의 영화계에 대한 다음과 같은 브레송의 경고 속에는 그가 말하는 단순함에 의한 주제 승화의 의의가 잘 드러나 있다.

 

예전에는 미를 종교화하고 주제를 승화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이 같은 고귀한 염원들이 있다. 그것은 물질과 사실주의寫實主義로부터 탈피하는 것이며, 자연에 대한 통속적 모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주제의 승화는 우선적으로 주제의 가치에 대한 충실성을 확보하려는 데서 비롯한 것이다. 사실 시네마토그라프의 이미지가 그 시각적 언어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따라서 그 사변의 언어 혹은 관념의 언어로 우리에게 의미하고 있지 않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시네마토그라프의 내용이다. “우발적인 것 속에 항시적인 것, 영원한 것이 있다”는 브레송의 표현은 하나의 이미지가 곧 내용 전체를 포함하고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주제의 승화는 곧 주제의 내용을 그 단순함으로부터 ‘하나의 광활한 조망’으로까지 나아가도록 하는 데 있다.

 

Ⅲ. 단순성의 방법론

 

브레송의 이미지의 흐름을 관찰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그는 자신의 이미지들을 통해 동시대의 영화 분위기를 단번에 변모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관객이나 영화인들의 선입관 한 가운데 서서 그들을 자신의 관점으로 유도하고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브레송의 위대한 점은 그가 동시대의 연극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시네마로서의 영화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의 해결책을 찾아내고자 당대의 심리적 사실주의자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며 꺼리고 있던 단순성에 의거한 영화적 표현을 과감히 시도한 데 있다. 실제로 브레송은 자신의 영화이론을 실천으로 옮기면서 단순성의 미학을 대중화하는 데 성공하였는데 『소매치기』와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가 바로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특히 후자는 비록 브레송 영화만의 특이성을 기대한 시네필들에게는 실망을 안겨준 부분도 있지만 대중들과 평론가 양편 모두로부터 극찬을 받은 예외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의 경우, 소설을 곧이곧대로 옮긴 단순한 시나리오 작법은 그 유명한 누벨바그의 선언서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 Une certaine tendance du cinéma français」의 토대를 이루며, 심리적 사실주의 감독들에 대한 구체적 비판의 논리적 근거로 인용되었다. 이 영화의 단순성은 시나리오의 단순성과 그에 따른 지루하기가지 한 카메라 워크의 단순성에 있다. 브레송과 콕토에 앞서 베르나노스의 동명 소설을 장 오랑슈 Jean Auranche와 피에르 보스트 Pierre Boste가 각색하였었다. 하지만 베르나노스는 그 의미 없는 복잡한 변화에 따른 지나친 왜곡에 그만 시나리오의 영화화를 거절해버리고 만다. 트뤼포는 베르나노스로부터 거절당한 이유를 ‘말 그대로 항상 고의적으로 정신을 왜곡하려는 관심’이라고 제시하면서, 브레송의 시나리오가 얼마나 영화적인지, 이와 반대로 오랑슈와 보스트의 시나리오는 얼마나 문자적인지 논리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소설의 내용 가운데는 영화화할 수 없는 장면이 있으며, 이러한 촬영 부적합한 내용을 카메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소설의 내용을 수정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오랑슈와 보스트, 이들은 원작 소설의 작품 정신과는 거리가 먼 복잡한 플롯이 가미된 시나리오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원전 정신의 몰이해의 소치로 규정한 트뤼포는 그의 글에서 이와 정반대로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시나리오로 옮긴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라프적 작가정신을 높이 사고 있다.

이러한 소설 그대로의 단순함을 유지한 각색은 당대의 영화인들에게는 영화적 배반 행위로 간주되고 있었다. 영화는 일기 형식의 소설의 내용을 신부의 독백으로 들려주고, 그 일기의 내용을 화면으로 보여주며, 일기를 쓰는 펜을 움직이는 신부의 손을 그대로 보여준다. 브레송은 이처럼 신부의 일기 속에 일어나는 평범한 문자적 이미지를 일기 형식의 문장 그대로 한자의 오차도 없이 카메라로 복원하며 시각적으로 사건화 한다. 즉 일상의 단편을 사건화 하는 원작 소설의 방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브레송의 영화적 독자성은 소설 그대로의 단순한 사건들을 영화적으로 사건화한 데 있다. 트뤼포는 원작 소설을 변형된 줄거리 위주로 문학적으로 옮긴 영화 즉 시네마로서의 영화를 영화 본류로 생각하던 당대 영화인의 사고의 틀을 부수기 위해 브레송의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의 방법을 실례로든 것이다. 시나리오 작가들의 각색에 의존한, 심리적 사실주의 감독들 예를 들어 클로드 오탕-라라 Claude Autant-Lara, 이브 알레그레 Yves Allegret 등의 영화를 문학적 영화로 규정하고 진정한 영화인이 쓴 시나리오에 의한 시네마토그라프의 방법을 누벨바그 영화의 전범으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영화적 독자성에 의거해야 한다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원칙은 브레송의 방법론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는 복잡한 플롯의 반전을 이용하여 대중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방법을 추구하면서도 예술 감독을 자처하는 동시대 감독들의 끈질긴 저항감을 일소시키기 위해 그들의 통상적 인식에 가장 적대적인 방법들을 사용했던 것 같다.브레송은 자신이 추구하는 진정한 체계를 표명하는 데 있어 “귀족의 멸시 대상이었던 과거의 위대한 예술가들의 단순함과 겸허함을 끝없이 찬미”하고 있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의 심오한 주제를 언급한 문학평론가들은 많지만, 그 심오함의 근거로서의 단순성의 사건화를 지적한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영화인으로서의 브레송은 그 저변의 단순함을 사건화하면서 원작과는 별도의 또 다른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를 창조한 것이다. 단순성의 사건화야말로 진정 예술가의 몫이 아닌가. 지극히 단순한 언어, 또한 지극히 단순한 감정, 또한 지극히 단순한 생각을 문자로 드러낸 베르나노스처럼 브레송은 이들을 단순한 이미지와 소리로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이 단순함이 창의성의 빈곤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베레니스, 서문. 강조 브레송)

 

너무 단순하다고 내가 버리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며 파고들어야 하는 것이다. 단순한 것들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불신들.

 

단순성의 미학에 의거하여 시네마토그라프가 일상의 증언이 되어야한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 그의 『노트』는 철저한 증언의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증언은 꼭 필요한 말들만을 담는다.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라프가 이러한 증언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 사물로 하여금 사물 스스로를 말하도록 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물과 말의 일치는 비단 철학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영화 이미지상의 사실주의의 요구이기도 하다. 시네마토그라프의 사실주의는 단순히 어떤 사실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이미지와 사물의 일치를 전제로 한다. 이미지와 사물의 일치를 추구하지 않는 사실주의는 한낱 구호에 불과할 따름이다. 브레송의 단순성의 미학은 사실주의 정신의 철저한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브레송의 단순성의 미학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도 보이는 이미지와 사물의 일치의 추구와도 궤를 같이 한다. 사물과 이미지의 일치, 이를 일컬어 정확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브레송 역시 이러한 ‘정확성에 대한 열정’을 그 무엇보다 중시한 것이다. ‘명확함을 확보하고 스스로 명학함의 매개가 될 것’을 다짐해야 하는 것은, 카메라가 하나의 도구이며 또 그만큼 자의적으로 다룰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 예술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위험으로 브레송의 단순성의 미학은 이 위험에 대한 의식이자 견제이다. 브레송은 ‘너무 일찍 찾아낸, 출발점으로서의 단순함’에 머물지 말고 ‘수 년 간의 노력의 대가로 얻어진, 귀결점으로서의 단순함’을 전제로 ‘거듭되는 실수와 잘못들로부터 벗어나, 나의 방법들을 깨닫고, 거기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시네아스트로서의 덕목을 중시한다.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연주를 듣고 그 단순성의 결여에 대한 아쉬움을 부친에게 편지로 전한 모차르트의 고백을 담은 다음과 같은 단상에도 브레송의 이러한 방법론에 대한 성찰이 드리워져 있다.

 

몇 편의 자신의 협주곡들(KV 413, 414, 415)에 관한 모차르트의 편지. 이 곡들은 지나치게 어려운 곡과 지나치게 쉬운 곡 정중앙에 있다. 이 곡들은 찬란하지만……그러나 무언가 가난함을 아쉬워하게 한다.

 

Ⅳ. 이미지-소리의 존재론

 

전통 인문학의 바탕을 이루면서도 미학적 의미에서 현대인의 특권으로 주어지는 영역으로서의 시와 예술이 궁극의 방향으로 삼았던 이러한 단순성의 표현은, 시네마토그라프를 개발한 뤼미에르 형제의 다큐멘터리 작품 이래 줄곧 지속되어 온 시네마토그라프의 정신이기도 하다. 이 정신은 곧 하나의 예술의 동력으로 작용하면서 그에 대한 몇몇 영화인들의 성찰을 통해 전승되어 오고 있다. 이 정신을 브레송 역시 자신의 지침으로 삼은 것이다. 특히 제한 된 시간을 조건으로 하는 영화 제작에 있어서 이러한 원칙은, 촬영 과정부터 이후 이미 찍어 놓은 무수한 이미지들을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편집 과정에 이르기까지, 그 절제된 이미지의 흐름 속에서 풍부한 실제적 효과를 창출하는 시네마토그라프 제작 전반에 걸쳐 매우 절실히 요구되는 사항이다.

사실성에 충실한 시네마토그라프의 이미지들은 사물들을 모사함으로써 삶을 표현하는 사진과는 그 느낌 전달의 과정이 매우 다르다. 연극이 아닌 시네마토그라프가 담아내는 현실의 삶의 공간은 관객들이 실감하는 그 공간 고유의 은밀한 법칙들로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진 이미지는 대부분 ‘묘사적이며, 특히 가공되지 않은 이미지는 묘사에 그치고’ 만다. 이러한 사진의 그릇된 위력을 억제하고 멋진 사진, 멋진 이미지가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이미지, 필수불가결한 사진을 필요로 한다는 이유에서 영화는 외형적 재현에 머물거나 자의적인 해석에 머물지 않고 사실성을 담아내야 한다.

 

한 편의 필름은 공연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공연은 실물의 등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진 촬영한 연극이나 시네마와 같이, 한편의 필름은 공연의 사진에 의한 재생일 수 있다. 한편, 공연의 사진 재생은 화가의 화폭이나 조각 작품의 사진 재생에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도나텔로의 「세례 요한」이나 베르메르의 「목걸이를 한 젊은 여인」의 사진에 의한 재생은 이 조각품이나 이 화폭이 지니는 힘도, 의미도,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 재생은 창조하지 않는다. 재생은 그 무엇도 창조하지 못한다.

 

사진 이미지 자체가 묘사성에 머물고 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브레송이 일상의 사실성을 담은 작품으로서 사진 자체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되는 것은 사진 자체가 아니라 연극 공연을 촬영한 비영화적 필름들로 이루어진 영화들이다. 이것들은 조각 자체가 아닌 조각을 촬영한 사진들, 회화 자체가 아닌 회화를 촬영한 사진들이 그러하듯 사실성을 결여한다. 여기에는 시네마토그라프로서의 특성이 아닌 연극의 특성 혹은 조각의 특성, 회화의 특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시네마토그라프는 처음부터 시네마토그라프 자체의 특성에 따라 구성되고 제작되어야 한다. 이것은 만약 영화가 예술이라면 영화를 예술일 수 있게끔 하는, 예술로서의 영화의 독자성인 그 특유한 생동감에 관한 논의와 무관하지 않다. 연극은 연극이고, 사진은 사진이듯, 영화는 단지 영화이기 때문이다. 즉 건축이 종합예술이 아니라 건축이듯, 영화 역시 오직 영화일 뿐이고 종합예술이 아니다. 그러기에 영화가 오직 영화일 수 있는 영화만의 장르로서의 독자적 존재성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게 되는 데, 그 중심 논의에 이미지와 소리의 연계가 창출하는 영화만의 생동감이 자리한다.

 

Ⅳ.1. 영화적 생동감: 이미지들의 관계맺음

 

누구나 알고 있듯 브레송은 시네마토그라프를 “움직이는 이미지들과 소리들로 쓰는 글쓰기이다”라고 규정한다. 나아가 시네마토그라프는 이미지만의 글쓰기도 아니고 소리만의 글쓰기도 아니며, 이미지들과 소리들로 쓰는 실제적 행동의 글쓰기이다. 시네마토그라프는 이렇게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 새로운 꿈의 형식의 예술로서 태어난 것인데, 그 새로움이란 바로 다른 어느 장르보다 실제적인 이미지의 생동감에 있었다. 로베르 데스노스는 이 시절의 감회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우리는 갓 태어났다. 우린 이제 막 『레미제라블 les Misérables』, 『방황하는 화란인 Le Hollandais volant』을 통해 글 읽기를 배운 셈이다. 참을 수 없는 사랑, 반항, 숭고함에 대한 욕구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우리는 악동이 아니었다. 우리는 조숙했던 것이다. 우린 서랍 속에 『클로딘느가 사람들 les Claudines』을 숨기곤 했다. 차례차례 『보복자 Vengeur』, 『물랭 루즈 Moulin Rouge』, 『메로드 드 클레오 Cléo de Mérode』를 꿈꾸어보기도 했었다. 이런 우리를 위해, 단지 우리만을 위해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발명한 것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우리 집에 있다. 그 어둠은 우리가 잠들기 전의 어둠이었다. 스크린은 우리의 꿈들에 평등을 실현시켰다.

 

이러한 꿈의 평등화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관계맺음을 통해 영사기 시네마토그라프 Cinématographe가 재현하는 영화적 생동감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이 영화적 생동감은 주제의 생동감이나 감동적인 내용으로부터 비롯하기 보다는 이미지들의 역동적 관계맺음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브레송은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감동적인 이미지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미지들을 생생하면서도 감동적이게 하는 이미지들 간의 상관관계를 통해서 감동을 줄 것.

 

이미지란 무엇인가? 가피오 Gaffiot의 라틴ㆍ프랑스어 사전에 의하면, 명사 ‘image’의 라틴 ‘imago’는 동사 ‘imitor’(imiter)의 파생어로 ‘représentaion, imitation, portrait’ 등으로 번역된다. 예술적으로는 작가들이 꿈꾸고 그리워하는 성스러움, 진실, 아름다움 등의 보편적 성격을 ‘imiter’한 ‘닮은꼴 ce qui ressemble’을 지칭한다. 실재하거나 부재하거나 자신의 염원의 대상을 그리는 회화적 이미지, 간절히 염원하는 이상적 소리를 음악으로 옮기는 청각적 이미지, 절대 진실의 사랑을 시어로 옮기는 시적 이미지를 비롯하여, 아이콘, 오벨리스크, 만다라 등은 각 종교가 기루는 성스러움의 이미지 등 이미지들은 각자가 기루는 이상과 닮고 합일하려는 예술가의 염원을 담고 있다.

이렇게 상호간 염원의 관계로서 기능해온 고정된 이미지들은, 과거를 현재로 옮겨 놓는 시간의 마술 상자로서의 영사기 시네마토그라프가 개발되면서, 시각적 예술의 공간성과 청각적 예술의 시간성의 제약을 넘어서는 보편적 생동감을 재생시키기에 이른다.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이는 듯 보이는 영화 이미지들의 흐름이 이미지들의 역동성을 창조해낸 것이다. 순간 포착의 글쓰기를 가능케 한 영사기 덕분에 가능해진 이미지들의 가현운동은 노루발처럼 가다ㆍ서다를 반복하면서 앞뒤의 이미지를 연결하는 재봉틀의 노루발 기술에 의거한 접목 기술에 다름 아니다. 이 역동적 관계맺음의 요소를 배제한 채, 프레임 하나하나의 구도를 설명하고, 미장센을 해설하고, 앵글에 의미를 부여하고, 영상 언어 문법을 설명하는 것은 다음 문제이다. 영화에는 원래 기호로서의 언어 역할보다는 이미지로서의 살아있는 말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타르콥스키는 영화에는 언어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하기까지 한다. 사실 영화의 최소 단위인 ‘프레임 cadre’만 해도 그 안에 담긴 많은 사물들을 표현하는 무수한 문장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지 않은가.

브레송의 이론에 따르면, 프레임에 담긴 사물들이 하나의 프레임을 구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네마토그라프로서의 한 작품의 존재는 줄거리에 있기보다는 작품을 이루는 카드르와 카드르, 플랑과 플랑 즉 이미지들의 유대관계에 있다. 익히 그 줄거리를 알고 있는 소설을 영화화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그 작품의 생동감은 감동적 이미지의 존재 여부나 스토리의 재구성이 아닌, 영화만의 영화적 특성을 담은 표현 형식 즉 이미지들의 관계맺음 형식에 의해 좌우된다. 물론 프레임을 이루는 미장센도 중요하지만 이미지들의 생명은 존재들과 사물들이 기대하고 있는 유대관계에 좌우된다. 회화의 흐름을 따르는 이미지들의 관계를 새롭게 맺어주는 것을 영화로 정의 내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어의 관계맺음 방식으로서의 문체처럼 영화의 생명으로서 이러한 이미지들의 관계맺음 방식이 작품의 스타일을 규정한다. 즉 저마다 독특한 스타일을 지닌 감독들, 감상의 대상으로서의 영화를 염두에 두는 감독들은 저마다의 스타일에 따른 독특한 분위기를 창출해낸다. 교향악 전체 음조가 자아내는 분위기가 작곡가의 기본 예술 개념에서 비롯하듯, 영화의 분위기 역시 그 작가가 지니는 기본 예술 개념에서 비롯한다. 작가의 기본 개념으로부터 솟아나는 향취로서의 분위기는 작가 자신의 창작 의지를 능동적으로 반영한다. 이 개념이 견실할수록 몸짓과 대사의 의미가 더욱 명확해지고, 그 주변 전체를 감싸고 흐르는 분위기가 더욱 명료해져 사물, 풍경, 배우의 이미지들이 서로에게 의존하면서 서로 필수불가결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렇게 각각의 이미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미지들에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물음을 던지게 되면서 이미지들 간의 작용ㆍ반작용 원칙을 준수하는 작가의 역량의 결과로서 영화가 그 생명력을 담보하게 된다.

개별 프레임으로서의 이미지 하나하나의 분위기를 창조할 것이 아니라 이미지들의 사이가 맺어내는 분위기에 전념하는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라프 이미지 체계는, 사물 개체의 존재를 실재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과는 달리 개체들 간의 관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존재론적이다. 실재적 개체의 생명으로서의 진실성은 각 개체 속에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이들이 형성하는 가치 있는 질서 속에서 가능성으로 존재하고 있다. 즉 관계 맺음을 통해서 존재의 가능성으로서 하나의 이미지의 생명을 보는 것이다.

생명을 얻고자, 존재들과 사물들이 기대하고 있는 유대 관계들.

 

진실은 네가 등장시키는 살아있는 인물들과 실물들 속에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 네가 그 인물과 실물의 이미지들을 다 같이 어떤 질서 속에 둘 때 그 이미지들은 진실한 모습을 띠게 된다. 역으로, 네가 그 인물과 실물의 이미지들을 다 같이 어떤 질서 속에 둘 때 그 이미지들이 띠게 되는 진실한 모습은 이 인물들과 실물들에게 실재성을 부여하게 된다.

 

여기에 존재론적 측면에서 시네마토그라프가 제시하고 있는 이미지의 의의가 담겨 있다. 즉 시네마토그라프는 이미지를 통한 사물의 열림을 도모한다. 이미지의 관계가 열어 보이는 사물은 더 이상 주어지고 고정된 것으로 비쳐지는 것이 아니라 그 한정된 영역의 광활함을 우리에게 비춘다. 이미지 작업은 이렇듯 사물에 대한 조망권을 확장시켜 가는 작업인 것이다. 마치 시적 언어를 통해 인간 정신의 눈이 더욱 확장되듯이 이미지는 “감동적인 이미지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미지들을 생생하면서도 감동적이게 하는 이미지들 간의 상관관계를 통해서” 인간 관계의 열림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감독은 화가나 조각가, 소설가처럼 인물과 대상의 겉모습을 모방할 필요가 없어진다. 시네마토그라프에서는 그런 일들을 카메라와 녹음기가 해결 해준다. 따라서 시네아스트의 창작력은 포착된 현실의 다양한 조각들 사이의 유대관계를 엮어내는 것에 국한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물들과 사물들을 분리할 수 있는 여러 부분들로 나누고. 이 부분들을 서로 분리시켜 이것들 각각에 독자성을 부여한 후 새로운 상호 의존 관계를 맺어 주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감독의 직감에 달린 문제이기에 무엇보다 감독의 기본 임무는 즉각적으로 감동적인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기 이전에 우선 이미지들 사이에 생동적인 상관관계를 맺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지 새로운 관계들뿐만이 아니라 관계 맺어진 것을 다시금 관계 지을 수 있는 정확하고 효율적인 방식을 찾아 내야 한다. 수 없이 반복해서 시도해본 이미지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인물들과 사물들의 관계들로부터 정확성이 탄생하는 법이다. 이 정확함에서 생동감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Ⅳ.2. 영화적 생동감: 이미지와 소리의 관계맺음

 

움직이는 이미지와 소리의 글쓰기로 정의되는 시네마토그라프에서 중요한 것은 음악이 아니라 소리이다. 이미지와 소리로 쓰는 시네마토그라프에서는 음악마저도 소리로 존재해야 한다(브레송에게는 소리가 이미지보다 더욱 중요한데, 소리는 한 층 더 내면적이기 때문이다). 음악은 음악대로 소리의 역할을 다하지만 시네마로서의 영화에서처럼 특히 블록버스터 영화에서처럼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시청각적인 구성으로서의 영화와 청각적인 구성으로서의 시각 효과를 연상시키는 음악은 장르적 특수성면에서 서로 어울리는 것이 아니므로, 음악 효과를 통해 작품의 품위를 고양시키려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미지를 압도하는 음악은 영화를 영화적 생명으로부터 괴리시키거나 관객을 도취시키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 영화에서 과도한 음악이 헤비메탈 공연에서처럼 실재를 변형시킬 뿐 아니라 심지어 실재를 파괴하기도 한다.

 

얼마나 많은 필름들이 음악에 의해 얼버무려 지는가! 사람들은 필름을 음악으로 가득 채운다. 사람들이 그 이미지들 안에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끔 방해한다.

 

시네마토그라프의 관객은 연주회의 청중이 아니므로 그들의 음악적 취향을 충족시켜줄 필요가 없다. 음악이 아닌 일상의 소리로서 시네마토그라프의 관객에게 현실을 일깨워야 한다. 예를 들어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가 들려주는 생명의 소리들, 즉 새벽잠을 깨우는 동네 닭소리,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의 수레바퀴 소리, 잠 못 이루는 신부의 침실 유리창을 무섭게 울리는 바람 소리, 진흙탕 길 위를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 학교를 마치고 귀가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등등 그동안 자신이 놓쳤던 이 모든 생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관객 자신의 영혼이 그 소리로 진동할 수 있기를 기대하게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이 소리를 어떻게 이미지와 연계시키는가 하는 것이 시네마토그라프로서의 영화적 표현의 관건이다

 

시네마토그라프로서의 영화에 있어서, 그 표현은 (배우이건 아니건 그들의) 몸짓과 목소리의 억양 즉 모방적 연기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들과 소리들의 관계를 통해 얻어진다. 분석도 설명도 하지 말 것. ‘재구성하지’ 말 것.

 

이미지와 소리가 서로 적절히 연계될 때, 서로 가까이 이어진 이미지와 소리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진 이미지와 소리 사이에서도 공조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이미지의 생동감이 강화된다. 시네마토그라프에서의 하나의 이미지, 하나의 소리는 절대적ㆍ독자적 가치를 지니지 않으므로, 독립된 이미지들, 독립된 소리들의 가치를 추구하는 경우 이미지들과 소리들 간의 조화가 상실될 수 있다. 그러므로 길가의 소리,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전철 들어오는 소리, 비행기 날아가는 소리 같은 비구성적 소음들이 이미지의 흐름에 따라 재구성할 때 이미지와 소리가 그 가치와 힘을 지니게 된다. 소리들 하나하나가 이미지에 적절하게 안배 되어야 비로소 이미지와 소리가 상호 접목되어 인물들과 사물들 사이의 생동감이 살아난다. 이 접목에 따른 영화의 기묘한 조화를 통해 통일성이 마련되는 까닭에, 효율적으로 재구성되지 못한 현란하고, 건조하고, 퇴폐적인 이미지의 조합은 그 허구성으로 인해 영화의 생동감을 저해하게 된다.

따라서 시선을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다면 구태여 소리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실을 담는 이미지에는 소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미지는 이미지대로, 소리는 소리대로 각각 자연스럽게 그 느낌을 드러내고 있다. 시네마토그라프에서 이 현실의 소리가 주는 자연스러운 느낌을 의도적 논리로 조형하거나 다른 소리로 덧칠한다면 생동감은 감소할 것이다. 이것은 이미지와 소리의 사실성과도 관계된 문제이기에 논리적 조작을 떠나 있는 그대로의 이미지와 소리의 흐름을 재현해야 한다. 논리에 의거하여 느낌을 분석하고 조립하려 하면 안 되는 것은 느낌은 언제나 자연스럽게 즉각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의 느낌을 유사한 이미지들과 동등한 소리들로 자연스럽게 전하는 확실한 시네마토그라프적 방법이 필요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동성이라는 일상의 몸짓과 목소리의 특징에 따라 이미지와 소리의 관계를 맺어주는 방법이다. 결국 시네마토그라프의 생동감은 연극의 형식과는 달리 자동성에서 유래하고 있다.

 

Ⅴ. 관계맺음의 조건; 자동성

 

정확하고 생동적인 이미지들과 소리들의 관계 맺음이 의도성보다는 메트로놈처럼 자동성에 의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브레송은 누누이 강조한다. 특히 “어떤 동작이건 우리를 드러낸다(몽테뉴). 그러나 동작은 (조종되지도 의도되지도 않은) 자동적일 때에만 우리를 드러낸다”는 그의 말에서 연극과 시네마토그라프의 차이에 관한 그의 시각이 분명히 드러난다. 연극은 의도된 연출에 따른 의도된 몸짓을 통해 보이지 않는 현실의 이면을 전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시네마토그라프는 의도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몸짓과 그 관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현실의 이면을 전한다. 브레송이 “우리의 동작의 9할은 습관과 자동적 움직임을 따른다. 우리의 동작을 의지와 사유에 종속시키는 것은 자연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단어들이 시인의 머리 속에 저절로 떠오르듯이, 이미지와 소리들이 눈과 귀에 저절로 떠올라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시어의 허식에 대한 견제와 우려처럼 이미지에 대한 허식과 견제와 우려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허식은 예술 작업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어는 그것이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려고 한다. 그러기에 허식은 시어의 속성이다. 이러한 시어의 속성은 또한 몸짓의 속성이기도 하다. 때문에 시인이든 영화인이든 허식에 대한 견제와 우려는 그들의 기본자세라 할 것이다. 브레송이 말하는 자동성은 실은 과장된 몸짓을 통제해야만 하는 영화 작업의 어려움이기에 몸짓의 자동성은 곧 시네마토그라프의 인물들의 몸짓에 관한 기본 조건으로 주어진다.

 

기계적으로 스무 번 되풀이한 몸짓이라면, 너의 모델들은 네 영화 속의 행동에 들어가서도 그 몸짓들을 원만하게 소화해낼 것이다. 그들이 서투르게 습득한 말들도, 굳이 정신을 기울일 필요 없이, 그 본래의 자연스러운 어조와 곡조를 찾게 될 것이다. 이것이 곧 실제 삶의 자동성을 되찾는 방식이다. (배우나 스타의 재능은 한 명이든 여러 명이든 더 이상 고려하지 말라. 중요한 것은 네가 너의 모델들에 또 네가 그들로부터 끌어 낸 모르던 것과 때 묻지 않은 것에 어떻게 다가가느냐이다.)

 

브레송이 1965년의 한 인터뷰에서 “말이 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지, 생각이 우리를 말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고 언급한 것도 이와 같은 이치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혹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생각하는 것은 거기에 완전히 자신이 몰입하지 않고 그 무엇에 종속되어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이 하고 있는 것, 자신이 하고 있는 것에 관한 생각, 이 둘은 그 어떤 몰입에도 장애물로 작용한다. 따라서 영화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영화는 의도적인 이미지들의 집합으로서 자동성을 결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듯 미셸 에스테브 Michel Estève는 브레송의 「소매치기」에 관하여 “주체는 점점 명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주제와 상징은 얼굴 모습을 통해 반영되고, 이야기 자체가 물음에 자리 잡는다. 그 배우들을 모델로 ‘단순화’하는 것이다”라고 해설하며, 필립 아르노 Philippe Arnaud는 “「소매치기」는 영화에 손 그리고 자동주의 의지에 인도되어 가는 새로운 무의식적 자동주의 영역을 추가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벵상 아미엘 Vincent Amiel은 「소매치기」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