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어린 왕자 여행기

스캔1

 

TV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기대 이상의 높은 시청률을 보이며 아쉬움 속에 막을 내렸다. 이 드라마는 별을 잊고 살아가던 많은 현대인에게 꿈과 현실의 접점으로서의 별의 의미를 일깨웠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대인이 영일 칠포리 암각화에 새긴 북두칠성, 대중의 염원을 담아 칠성각 벽화로 남긴 북두칠성, 빈센트가 〈론 강의 별밤〉에 수놓은 북두칠성처럼 인류가 형상화한 별들은 저마다 어떤 알 수 없는 간절함을 담고 있다. 노란빛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회화로서의 빈센트의 별, 의인화된 풍속화로서 칠성신으로서의 별,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을 열어 보이는 시어로서의 윤동주의 별.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큰곰자리 Ursa Major, 오리온성운Orion nebula, 직녀 Vega 등 많은 상품 이름 별 이름들 역시 우리와 매우 친근하다. 이러한 별들은 고대 이래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 왔다. 그리스 신화의 아홉 뮤즈 가운데 천문의 여신 우라누스 Uranus가 등장하여 시와 예술을 주도하고, 현대에 이르러 윤동주 시인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쓰고, 같은 무렵 독일의 지배 아래에 있던 프랑스 작가 앙투안느 드 생텍쥐페리가 <바람과 모래 그리고 별>을 쓴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리라.
생텍쥐페리는 비행사로서의 경험을 통해 진실을 별에서 찾고 그가 찾은 진실로서의 ‘사랑과 우정의 길들임’이라는 소박하면서도 근원적인 명제를 다른 별에서 온 어린왕자의 여행기로 풀어냈다. 이 이야기를 하이데거는 <어린왕자> 독일어본 서문에서 “20세기에 쓰인 가장 위대한 실존적 저술”, “모든 고독을 달래주고, 세상의 장엄한 신비를 이해하게끔 인도하는 위대한 시인의 메시지”라고 평하고, 법정 스님은 <어린왕자>를 “단순한 책이 아니라 하나의 경전”으로 정의하며, “누가 나더러 지묵으로 된 한두 권의 책을 선택하라면 <화엄경>과 함께 선뜻 너를 고르겠다.”고 말했을 정도이다.(<무소유>, <영혼의 母音>(‘어린왕자에게 부치는 편지’) 이번 호에서는 이러한 평가를 낳은 <어린왕자>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그 줄거리를 소개해본다.

<어린왕자>는 두 사람의 여행 이야기이다. 하나는 선재동자처럼 진실을 찾아 나선 어린왕자의 구도 여행이고, 또 하나는 어린왕자의 기원을 찾아가는 작가 생텍쥐페리의 여행이다. 비행사의 분신이기도 한 어린왕자는 어른들이라는 여러 장애물을 극복하고 조력자로서의 보살의 경지에 이른 지혜로운 여우와 뱀과의 예기치 못한 만남을 통해 우정과 사랑이라는 마법의 지혜를 얻어 자신의 별로 돌아간다.
화자인 비행사는 하늘에 놓인 새로운 길을 탐사하고자 비행을 시작하였으나 사막에 불시착하여 신비한 어린아이를 만나 홀로 여행 중인 이 아이의 여행담을 들으며 자신의 별로 돌아가는 어린왕자의 기원과 신비를 풀고 일상으로 귀환하게 된다.
다시 말해, 깨달음을 찾아 구도의 여정을 나선 어린왕자와 이 어린왕자의 정체를 탐구하는 어른의 구조의 여정이 동시에 전개되고 있다. 두 인물은 헤어지지만 서로 길들어 각자의 별에서 꽃과 우물을 바라보며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별들의 웃음소리와 도르래 소리를 들으며 살아간다.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된 것이다.
사실 어린왕자는 누구나 그러하듯 순수하기만 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사랑을 모르던 그는 자신을 까탈스럽게 대하는 장미가 귀찮아져 새로운 친구와 일자리를 구하고 깨달음도 얻을 겸 여섯별을 유람한다. 우스꽝스러운 왕, 허영장이, 술아저씨, 사업가, 지리학자를 만나 실망하나 다행히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가로등지기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한다. 하지만 정직한 대화가 불가능했기에 이 어른들과 친구가 될 수는 없었다.
마지막 별 지구에 도착하여 처음 만난 뱀은 어린왕자를 만나자 그 순수함을 보고 어린왕자가 원하면 언제든지 고향으로 보내주겠다며 다시 찾아오라 한다. 꽃은 어린왕자에게 사람들은 뿌리가 없어 제자리를 맴돌며 고통스러워한다고 일러주기도 한다. 모래와 바위와 눈길을 헤치고 마주한 정원에는 무려 오천 송이의 장미가 만발해 있었다. 이 세상에 단 한 송이뿐인 꽃을 갖고 있어 부자라고 믿었던 어린왕자는 그만 장미 한 송이와 세 개의 화산으로는 위대한 왕자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만 풀밭에 누워 울고 만다.
거창하고 심오한 것을 찾아 위대한 왕자가 되고자 했던 어린왕자가 여우를 만나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아니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어린왕자는 자신이 장미에 바친 시간 때문에 그 장미가 그토록 소중하고, 자신이 있는 곳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하며, 한 송이 장미나 물 한 모금에서 내가 찾고 있는 것을 구할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또 다른 나로 변하고 장미의 사랑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여우와의 이별은 아픔으로 다가왔지만 순진하고 연약한, 보이지 장미를 찾아 새로운 여행을 시도한다. 무거운 몸뚱이로는 너무 힘들고 먼 여행이다. 어린왕자는 뱀의 호의로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몸을 버리고 생텍스 아저씨가 그려준 양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간다.
여섯 소행성과 지구로의 여행은 사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아니다. 실제로 벌어진 사건은 생텍스의 비행기가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것뿐이다. 사막 한복판에서의 견딜 수 없는 고독과 갈증과 사투를 벌이던 생텍스의 마음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 생텍스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진실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마음으로 본 결과 자신은 사랑과 우정을 통해서만 존재하며 우리는 그 관계의 매듭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고하게 깨쳤다. 아저씨 생텍스가 어른이라는 자신의 껍데기 속에 잠자고 있던 마음속의 어린왕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성공에 전념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사랑도 우정도 없이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닐 것인가. 친구를 돈으로 살 수 없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돈으로 깨우침을 살수 없듯이……
생텍쥐페리는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를 길들여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길들이다’는 ‘어떤 일에 익숙해지다.’ 혹은 ‘행동하는 방법이나 생활 습관을 지도하여 올바르게 나가도록 하다.’라는 뜻을 의미하는데, 예전에는 ‘질드리다’로 썼다. 세조의 불경언해본들에 그 용례가 자주 나온다.

– 조어(부처)는 길들이는 사람이오. ― <월인석보>(1459) 9:11
남염부제 중생은 성품이 강해 질드려 항복하기 어렵거늘. ― <월인석보>(1459) 21:116
그 마음을 질드려 큰 지혜를 가르치시니. ― <묘법연화경언해>(1463) 2:252

‘길들이다’라는 말은 요즘 와서 순응적인 인간의 태도를 의미하는 야유적인 이미지도 지니게 되었지만 원래 우리말에서는 자연 상태의 인간의 마음을 순화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지도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서양의 ‘길들이다aaprivoiser’(tame)는 동물을 ‘길들이다’ 혹은 ‘서로 친구가 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으며, 생텍쥐페리도 마음속 순수한 심성을 찾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사용하여 우리의 ‘질드리다’와 유사하게 사용하고 있다. 우리 모두 내 마음을 길들이고 친구 같은 도반에 길들어 서로를 배려하는 새로운 반김의 사회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염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