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텍쥐페리에게 부치는 한국 역자의 편지
어른인 내가 『어린왕자』를 반복해서 읽고 번역까지 하게 된 것은 독자로서 저자인 그대의 부탁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어린왕자』가 아무 생각 없이 읽히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당신은 친구를 잊지 않기 위해서 어린왕자를 그린다고 했습니다. 당신 말대로 친구를 잊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누구에게나 친구가 있던 것도 아니지요. 나는 이제야 당신이 말하는 친구의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친구는 자기를 길들이는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만드는 이가 친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과 친구 되고 싶어 『어린왕자』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알고 싶은 것도 많고, 친구도 사귀고 싶어 자신을 떠나려는 어린왕자에게 당신의 여우는 말했습니다. 오직 길들여진 것만 알 수 있다고. 완제품만 구매하는 시대의 사람들은 알고 싶은 것도 없다고. 친구 파는 가게가 없으니 이제 친구도 없다고. 친구를 원하면 자기를 길들이라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어린왕자가 묻자 여우는 말했죠. “참을 줄 알아야 해.”
당신이 유고집 『성채』에서 말했듯이, 나는 사람들이 맺는 관계의 매듭에 지나지 않습니다. 친구가 없으면 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나를 길들인 당신이 있습니다. 나는 『어린왕자』를 경전처럼 읽어왔습니다. 처음에는 당신이 우려하듯이 아무 생각 없이 건성으로 읽었습니다. 담백한 문장으로 쓰인 짧은 분량의 『어린왕자』는 부담 없는 대화의 소재이자 나를 위안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어린왕자를 만난 리비아 사막 이야기 『인간의 대지 Terre des Hommes』를 읽고 어린왕자가 이 소설의 후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책을 『사람들의 땅』이라 옮겼습니다. 『사람들의 땅』 마지막 부분, 열차 속 어른들 틈에 끼여 잠든 아이를 발견한 생텍쥐페리는 이내 안타까운 심정으로 다음과 같이 독백합니다.
“이 얼굴은 음악가의 얼굴이야. 어린아이로서의 모차르트란 말이지. 생명의 아름다운 약속이 여기에 있지 않나. 동화에 나오는 어린왕자들도 이와 다르지 않았는데…모차르트도 카페의 악취 속에서 들리는 썩은 음악을 자신의 큰 기쁨으로 즐기게 되겠지. 모차르트가 사형선고를 받은 거지.”
다시 『어린왕자』를 펼쳤습니다. 그리고 생텍쥐페리 당신이 왜 어린아이 시절의 레옹 베르트에게 『어린왕자』를 바쳤는지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어른 레옹 베르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그 어린 시절의 친구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죠. 나는 『어린왕자』만큼 감동적인 20세기 시집이나 철학서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떤 현대 시인도, 어떤 철학자도 당신만큼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다. 앞서 우리 시대의 스승 법정 스님은 어린왕자를 가장 난해한 화엄경 경지의 고전으로 소개하고,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어린왕자를 20세기에 쓰인 가장 위대한 실존적 저술 가운데 한 권이라 평했었지요. 나는 생텍쥐페리 당신이야말로 진정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당신은 시인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당신은 전업작가도 아니고 우편비행사이고 전투비행사이기도 하지요. 당신이 순수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그저 비행 조종사로서 남을 위해 목숨을 건 비행일지를 쓰다 전투비행사로서 그렇게 다른 별로 떠났을 뿐이지요.
제2차 세계대전에 지원한 당신은 1944년 동료들의 만류에도 출항하여 당신의 소설을 읽고 비행사의 꿈을 실현한 독일 공군 리페르트의 기총 사격으로 지중해에 추락하였습니다. 당신의 장미 콘수엘로 순신의 이름이 새겨진 팔찌로 남은 당신은 어린왕자로 부활하여 세계 곳곳의 사람들을 맺어주고 있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 이어 세계베스트셀러 판매부수 2위를 유지하며 올해 71세를 맞은 어린왕자는 27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최근에는 파리의 인도 유학생 미쉬라가 유럽어의 조상어인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항상 고마운 마음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여우가 스승이자 친구가 되듯이 진정한 스승은 곧 자신을 길들이는 친구라고. 당신은 나의 진정한 스승으로서 친구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친구가 되고자 나는 당신의 책에 길들었습니다. 거창하고 현학적인 어휘 하나 없이 일상어로 본질적이며 존재론적 사유를 전하는 당신은 진정한 나의 스승입니다.
당신을 상품화하는 어린왕자 재단 사업가들과 출판업자들은 이미 어린왕자 속 풍자 대상인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이지요. 한국 강단 프랑스 문학자들은 어린왕자 속의 지리학자를 닮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나는 어린왕자 별을 밝히는 가로등지기 심정으로 친구를 찾아 나섰습니다. 생텍쥐페리 당신을 통해서만, 오직 어린왕자 당신을 통해서만 새로운 친구를 맺고 싶습니다. 당신을 읽고 당신을 길들인 사람과 친구 하고 싶습니다. 그건 정말 서로 참고 기다려야 하는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나의 진정한 고향은 어린왕자 별입니다. 나는 조국을 모릅니다. 나는 대학도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외롭지 않습니다. 하지만 외롭기도 합니다. 학연과 지연을 떠나 친구가 몇이나 될지 생각하면 외롭지만, 어느 별 아래 어린왕자를 읽고 친구를 생각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외롭지 않습니다. 이런 친구들과 만나고 싶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닌 친구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지요.
『어린왕자』를 쓴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내가 길들인 것만 알 수 있음을 깨우쳐 줘서. 어른들에게 『어린왕자』를 읽도록 권유하는 보람을 알게 해줘서. 이 어른들과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게 해줘서. 서로의 여우가 되고, 친구가 되어 위선적 교육자들과 교양 없는 문화인, 거짓말쟁이 정치꾼과 이기적인 기업인이 줄어들고, 더 이상 불행한 재난과 불필요한 악이 발생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당신의 삶이 보여주듯, 위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 성공한 사람이 아닌 친구를 존경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렇게 당신의 성스러운 죽음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생텍쥐페리여! 그대 그리고 그대의 별, 친구 어린왕자와 그의 장미, 그대가 그려준 양의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을 기원합니다.
“그대는 관계의 매듭이고 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는 그대의 관계에 의존하여 존재한다. 그대의 관계는 그대에 의존하여 존재한다.” -생텍쥐페리, 『성채Citadelle』
『어린왕자』 읽고 번역한
한국의 어른 송태효 두손모아 고개숙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