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 그리고 물

K-20150325-298194

거창하고 심오한 것을 찾아 위대한 왕자가 되고자 자신의 별 소행성 612호를 떠나온 어린 왕자는 여우를 만나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어린 왕자에게 그것은 숙명적 만남이었다. 어린 왕자는 자신이 장미에 바친 시간 때문에 그 장미가 그토록 소중하고, 자신이 있는 곳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하며, 한 송이 장미나 물 한 모금에서 사람들이 찾고 있는 것을 구할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또 다른 나로 변해 자신이 느끼지 못해 받아들이지 못한 장미의 사랑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여우와의 이별은 아픔으로 다가왔지만 호사스럽지만 연약하고 다정한 장미를 다시 찾는 여행을 결심한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껍데기인 몸과의 결별을 선택한다. 무거운 몸뚱이로는 너무 힘들고 먼 귀향이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는 지혜의 화신 뱀의 도움을 빌려 멀고도 힘든 여행길에 방해되는, 허물에 지나지 않는 몸을 버리고 생텍쥐페리가 그려준 양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간다.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여우가 가르쳐 준 단순한 비밀은 어린 왕자가 자신의 별로 돌아가기 위한 여행 방법을 선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철새의 이동을 따라 온 여행은 이제 불가능하여 마음으로만 길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의 선택에 동의하기라도 하듯 죽어가는 어린 왕자의 시신을 보며 몸과 마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본다.
어린 왕자가 지구를 떠나지 전날 밤 비행사는 잠이 든 어린 왕자를 품에 안고 걸으며 감동적인 순간을 맞이한다. 마치 부서지기 쉬운 어떤 보물을 안고 가듯 마치 이 지구에는 이보다 더 부서지기 쉬운 것이 없을 듯 창백한 달빛을 머금은 어린 왕자의 어여쁜 이마, 그 감긴 눈, 바람결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그는 생각한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껍데기에 지나지 않아.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어린 왕자는 비행사와 헤어지면서 “알지. 거긴 너무 멀거든. 이 몸을 가져갈 수 없어. 너무 무겁거든. 몸이란 벗어젖힌 낡은 껍데기 같은 거야. 낡은 껍데기가 슬플 건 없잖아.”라고 이별의 말을 남기며 자신의 몸을 포기하고 마음으로 떠나간다. 전시 조종사로서의 경험을 다룬 소설 『전시조종사Pilote de guerre』에서의 생텍쥐페리 자신의 몸에 대한 정의는 다분히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몸은 이제 자신과 아무 상관없으며, 몸에게 바라는 바도 없으며, 더 이상 바라는 것도 없다 보니 필요한 것도 없다고 고백한다. 지금까지 자신이었던 몸을 부정하게 된다. 생각한 것도 내가 아니요, 시련을 겪은 것도 내가 아니라 자신의 몸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할 수 없이 이놈의 몸뚱이를 근근이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이제야 그것이 하등의 가치도 없음을 발견하다니.”
법정스님도 『무소유』(영혼의 母音)(범우사, 1979)에서 어린 왕자의 죽음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어린 왕자! 너는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더구나. 이 육신을 묵은 허물로 비유하면서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더구나.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삶은 한 조각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은 한 조각구름이 스러지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더라.”
파리의 명문 생루이 고등학교 시절 도스토옙스키와 보들레르를 애독한 생텍쥐페리는, 여우와 뱀을 친구로 삼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몸과 마음을 이원론적 관념론에 근거하여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땅』에서 안데스 산맥에서 조난당하여 사투를 헤매다 발견된 기요메의 굳어버린 몸을 보고 생텍쥐페리는 “자네 몸은 바위도 눈도 잊지 못하고 있었지.”라고 말하거니 “‘정령’이 점토에 숨결을 불어넣는다면, 오로지 그러한 정령만이 ‘인간’을 창조할 수 있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몸이 깨어 있을 수 있는 근거를 마음으로부터 구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어린 왕자』의 주제는 이 깨어 있음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생텍쥐페리는 인식 대상을 깨어 있는 존재와 잠자는 존재, 이 두 부류로 분류할 정도로 마음의 작용을 중시한다. 깨어 있느냐 혹은 잠들어 있느냐의 문제는 몸에 정신을 불어 넣느냐 혹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어린 왕자가 자신의 전 재산을 ‘장미 한 송이’와 더불어 무릎 정도 크기의 ‘깨어 있는 화산’과 ‘꺼진 화산’으로 소개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장미의 싹이 틈을 강조하고(8장), “가로등을 끄면 그 꽃과 별을 재우는 거지.”(14장), “우물을 깨우니 노래 부르네.”(25장)라는 표현과 아울러 매우 직설적으로 잠들어 있는 어른들을 풍자하는 경우도 그렇다.
“열차 안에서 잠을 자지 않으면 하품이나 하고 있지. 아이들만 유리창에 코를 박고 있지. 애들만이 자신들이 무얼 찾는지 알지. 아이들은 헝겊 인형에 시간을 바치지. 그래서 인형이 매우 소중한 것이 되지. 인형을 빼앗기면 당연히 울어 대고…”(22장)
잠든 몸과 마음을 깨우는 것은 물이다. 『어린 왕자』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지…”(24장)라는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우물이 제공하는 물의 기능에 있다. 『어린 왕자』에는 두 가지 물과 두 가지 목마름이 제시되는데 신체적 갈증을 해소하는 물과 정신적 갈증을 해소하는 마음의 양식으로서의 물이 그것이다. 비행사는 어린 왕자의 도움으로 발견한 우물에 이르러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려 눈을 감고 물을 마셨다. 마치 무슨 축제처럼 달콤한 그 물은 일반 음료와는 다른 무엇이었다. 그 물은 별빛 아래서 벌인 행진과 도르래가 내는 노랫소리, 내 두 팔로 이룬 노력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우물물은 마치 선물처럼 마음에도 좋은 것이었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트리의 불빛과 자정미사 성가와 사람들의 온화한 미소 속에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이었다.

“아저씨별 사람들은 한 정원에 장미꽃을 오천 송이나 가꾸지만……정원에서 자신들이 찾는 것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어……”
“찾아낼 수 없고말고.”
“그렇지만 그들이 찾는 것을 장미 한 송이나 물 한 모금에서 찾아낼 수도 있어……”(25장)

여우의 가르침에 힘입어 선지식이 된 어린 왕자가 어른의 생각을 간파하고 어른에게 선물 이상의 물의 의미를 전하는 것은, 물이 곧 마음을 깨워 몸에 생명을 불어넣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생텍쥐페리 자신이 이미 생사를 넘나드는 사막에서의 조난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인지도 모른다. 맛도 없고, 빛깔도 없고, 향도 없는 물은 생명에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다. 물은 설명할 수 없는 쾌락으로 우리 몸을 파고든다. 물과 더불어 우리 안에 고갈되었던 마음의 샘들이 다시 솟아나는 것이다.

그렇다. 이 우주의 근원을 넘나드는 사람에겐 죽음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야. 죽음도 삶의 한 과정이니까. 어린 왕자, 너의 실체는 그 묵은 허물 같은 것이 아닐 거야. 그건 낡은 옷이니까. 옷이 낡으면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우리들의 육신도 그럴 거다. 그리고 네가 살던 별나라로 돌아가려면 사실 그 몸뚱이를 가지고 가기에는 거추장스러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