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있음의 철학
– 데카르트와 어린 왕자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개인의 본질과 실체를 떠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사람이 세상과 맺는 관계와 책임을 탐구한다. 불교의 연기 사상과 닮은꼴인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일본의 선 사상에 매진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실존주의는 17세기 프랑스 합리주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자아성찰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데카르트는 흔히 알려졌듯이 이원론자도 아니고 합리성의 틀에 갇힌 사색가도 아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그 얼마나 시적인 표현인가? 그의 자신의 최후 저술인 『정념론Traité des passions』에서 정신과 육체의 통일성을 추구하고, 그의 주저인 『성찰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에서는 어린 왕자처럼 순수 관념적 사유에서 벗어나 삶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 깨달은 생각과 행동을 중시한다. 나아가 데카르트는 사랑이 선물한 이성의 지침에 따라 어린 시절로 돌아가 모든 것을 자신의 토대 위에 건설하라고 충고하기까지 한다. 이점은 바로 우리 자신 속에 품고 사는 어린 왕자를 일깨우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사르트르는 『어린 왕자』의 전편인 생텍쥐페리의 『사람들의 땅』을 실존주의의 기원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작가의 어린 시절 그리고 자신 속에 품고 살던 어린 왕자의 말을 통해 우리는, 신뢰, 의심, 분석, 추론 혹은 종합, 열거, 형식적 귀납법 같은 데카르트의 ‘정신지도규칙regulae ad directionem ingenii’을 발견한다. 이러한 방법론에 따라 항상 깨어 있어야 함을 일깨우는 데카르트의 철학은, 보이지 않는 샘이 사막을 아름답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어린 왕자』의 주제이기도 하다.
문득 사막의 그 신비로운 광채가 이해되자 나는 놀라고 말았다. 어린 시절 나는 고가에서 살았다. 전설에 의하면 그 집에 보물이 감춰져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무도 보물을 찾아낼 수 없었고, 어쩌면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 전설로 집안 전체가 매혹에 휩싸이는 것이었다. 내 집은 그 가슴 깊숙이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ⅩⅩⅣ)
생텍쥐페리는 깨어 있는 존재와 잠자는 존재, 이 두 부류로 대상을 인식한다. 나는 깨어 있을까? 잠들어 있을까? 중요한 것은 깨어 있으려는 노력 자체이다. “가로등을 끄면 그 꽃과 별을 재우는 거지.” (ⅩⅣ)“우물을 깨우니 노래 부르네.” (ⅩⅩⅤ)
이러한 대화는 간절한 마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투시하는 『어린 왕자』의 본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어린 왕자는 모자같이 생긴 그림을 보고는 단번에 그 의미를 알아챘다. 속이 안 보이는 보아 구렁이 그림 따위 집어치우라던 어른들의 천박한 충고와는 달리,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며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보여준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는 어른들과 달리 어린 왕자는 비행사가 그려준 상자 속의 보이지 않는 양을 마음으로 보았다. 즉, 보이지 않는 것,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만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다.
– 철학의 본질, 사랑
“사랑은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그 희생물과 융화되기를 원한다.” ― 보들레르 『불화살 Fusées』Ⅰ.
생텍쥐페리는 고교 시절 니체와 보들레르를 즐겨 읽었다. 니체와 보들레르는 자기중심적인 ‘나’를 벗어나 ‘내가 아닌 나'(非我)를 추구한 사랑의 철학가들이다. 이렇게 나를 벗어난 존재를 진실한 인간으로 본 이들의 사상을 영웅주의 혹은 초인사상으로 부른다.
그것은 물론 정신의 영웅주의이다. 두 작가 모두 초기 바그너 작품을 극찬하다 기교와 규모에 집중해가는 작곡가를 평가 절하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공허한 장식물들만을 첨가하는 예술가들을 비평한 그들처럼 생텍쥐페리는 존재의 본질을 추구하고 그 본질이란 다름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관계 맺음으로서 사랑이며, 사랑은 자신을 벗어나 서로 함께 하는 데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라는 것을 벗어나 어떤 공동의 목적에 의해 형제들과 연결되어 있을 때,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숨 쉬는 것이다. 그리고 경험상 우리는 사랑한다는 것이 우리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 생텍쥐페리, 『사람들의 땅』.
결국 예술이란 ‘나’라는 주체의 개념을 넘어 우리를 함께함으로 인도하는 고귀한 깨달음으로의 여행이다. ‘나’를 벗어나 ‘우리’가 되는 사랑의 가르침은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조르주 바타유의 핵심 사상이기도 하다. 그는 예술과 철학의 공통 토대가 희생에 있으며 이 희생이 나를 벗어나 우리가 되는 필수 조건임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생텍쥐페리는 그 어느 동시대 철학들에 못지않게 철학과 예술의 본질이 이기심을 버리는 데 있음을 간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랑의 실천으로서의 글쓰기에 매진한 것이다.
-쓰는 법이 아니라 보는 법을 배우자.
생텍쥐페리가 약혼녀 루이즈 빌모렝과 헤어지고 고등학교 동창 베르트랑의 누이 리네트에게 보낸 편지(1923년 무렵)에는 우리의 보는 법과과 관련하여 재고해볼 만한 내용이 담겨 있다.
쓰는 것을 배워서는 안 됩니다. 보는 것을 배워야지요. 쓴다는 직업은 결과적으로 생기는 어떤 것이지요.
좋은 작품은 글쓰기 기술에 의해 편집된 결과물이 아니라 본질적인 세계를 마음으로 바라보는 작가 세계관의 반영이다. 생각하고 의심해보고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데카르트적 성찰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같은 ‘깨어 있음’의 의의, 여우와 뱀을 진실한 친구로 반기며 관계의 책임을 중시하는 실존적 선택,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적 사랑 등 관습적 사유와 이기심을 떠난 진정한 현대적 사유가 『어린 왕자』의 저술의 토대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때 비로소 진정성 어린 작품이 가능해짐을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들이 『어린 왕자』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텍쥐페리의 본질적인 글쓰기이다. 하이데거와 그의 제자 사르트르, 심지어 사르트르와 다른 토대에서 철학을 펼친 메를로퐁티가 그 어느 철학 유파에 속한 적이 없던 작가 생텍쥐페리의 언어를 존중한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마음으로 읽고 우리 가족과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염원해본다.
“그래. 집이건 별이건 혹은 사막이건 그들을 아름답게 하는 건 눈에 보이지 않지”(ⅩⅩ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