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사이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가 20세기 최고의 실존철학서 가운데 한 권이라고 평가한 『어린 왕자』. 그의 제자 사르트르가 프랑스 실존주의 기원으로 평가한, 『어린 왕자』의 전편 『사람들의 땅』(인간의 대지). 이 작품들에 등장하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시절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한 생텍쥐페리의 유심관을 읽을 수 있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함을 일깨우는 붓다의 가르침이 그러하듯 보이지 않는 샘이 사막을 아름답게 한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 생텍쥐페리는 사막과도 같은 도시 문명 속에 숨어 있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마음으로 추억하게 한다. 그가 살았던 옛날 시골집에 관한 전설을 이야기하는 대목은 보이지 않는 것 속에 감추어진 것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전설에 의하면 그 집에 보물이 감춰져 있었는데 아무도 보물을 찾아낼 수 없었고,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전설로 집안 전체가 매혹에 휩싸인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부모들 대부분은 힘들고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주택 개발 사업 덕분에 서울 변두리 시영 주택 단지에서 부모님과 세 여동생 그리고 무작정 상경한 식모라 불리던 가사도우미가 함께 생활하던 조그만 우리 집. 방 두 개 마루 하나인 작은 공간에서 우리는 작은 방에 나란히 누워 오손도손 동화책 이야기도 하고 별똥별 이야기도 하며 잠자리에 들어 다정한 일상의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다. 책상 겸 밥상에서 쪼그려 앉아 일기를 쓰던 아랫목의 따끈따끈함, 감동의 세계위인전집과 눈물의 『플란다스의 개』가 꽂힌 작은 책장의 초라함, 좁은 마당에서 우리를 반기던 강아지 해피의 이국 향취, 그 강아지와 함께 노닐던 뒷동산에 걸린 보름달의 광명 등등…… 분명 그 초라한 나의 집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직도 무엇인가 보물 같은 가족의 신비스러움을 선사한다. 아마도 아파트에 갇혀 사는 형제자매가 드문 오늘의 도시 아이들에겐 경험할 수 없는 추억이리라.
어린 왕자는 보이지 않는 신비로움을 발견하는 계기를 선물한다. 현대인이 살아가는 이 황량한 도시 사막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을 일깨워준다. 물적 재화에 모든 것은 거는 황량한 도시의 모래사막 한복판에서 보이지 않는 샘을 보게 해주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따지며 일희일비하는 우리에게 일상에 내면을 들여다보고 보이지 않는 것 즉 사랑과 우정 같은 존재의 진실을 생각해보게 한다. 그런데 이 보이지 않는 진실은 항상 보이는 것 속에 스스로 그렇게(自然) 있다. 자신을 숨기려거나 드러내려는 것도 아닌 채 그렇게 있는 사랑과 우정 같은 귀중한 가치들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중간 즈음에 그냥 그대로 있다. 그렇게 원래 있던,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은 실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뒤섞여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듯하지만 생각해보면 생각할수록 소중하게 다가오는 어린 시절의 추억처럼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추억하다 보면 보이지 않는 것이 떠오른다. 과거 자신의 별의 장미를 추억함으로써 그대는 보지 못한 사랑의 소중함을 느끼듯, 어린 왕자는 과거와 미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나아가 삶과 죽음, 실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을 더 이상 모순으로 보지 않는다. 어린 왕자는 마치 일체유심조의 경지에 이른 선재동자처럼 모든 것이 마음의 지어냄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음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다. 어린 왕자의 강렬한 사랑이 던져주는 신비 체험의 강렬함은 서로 이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을 보는 것이다.
『어린 왕자』 속의 삽화로서 하나의 얼굴 혹은 하나의 풍경은 가시적이면서 궁극적으로는 비가시적인 적인 것을 보여준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보는 것에 대해 지니는 이해와는 달리 가시성의 차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가시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 유명한 어린 왕자의 초상,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저작권을 지닌 이 얼굴과 의상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교차한다. 어린 왕자를 본 사람은 생텍쥐페리도 여우도 뱀만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윤동주의 시구에서 떨리는 잎새에 이는 보이지 않는 바람을 보는 심안을 지닌 존재는 누구라도 어린 왕자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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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는 자신의 소설 도처에서 시각의 주체로서의 마음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중간에 넣는다. “내 비밀은 이거야. 아주 단순하지.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보인다는 거야. 본질적인 건 눈에 보이지 않아.”라는 여우의 말은 보이는 것과 보이는 않는 것의 대립을 상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은 관념론자들의 이원론적 대립론을 따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 속에 있기 때문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지……”라는 명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보이지 않는 샘을 품고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사막이며, 이 둘의 만남은 오로지 눈과 머리가 아닌 마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어린 왕자』는 강렬한 신비적 종교 체험이 가리키는 지점으로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소통을 드러낸다. 비행사로서의 직업, 업무상 발생하는 예기치 못한 사고, 그 경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낯선 존재와의 우정, 이 우정을 통한 길들임의 깨달음과 책임이라는 보이지 않은 관계는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분명히 실재한다. 진실을 조건으로 우리를 함께함으로 이끄는 동화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흔히 宗敎로 번역하는 ‘religion’은 ‘re(다시)+lig(신과 잇는, 결합하는)+ion(것)’으로 재결합을 의미한다. 宗敎는 원래 ‘부처의 근본이 되는 가르침’을 의미하는 불교용어로서 종(宗)은 붓다의 말씀이요, 교(敎)는 이것을 알기 쉽게 풀이한 것이다. 불법의 근본은 ‘不二’ 즉 하나 됨에 있으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은 것을 하나로 본 생텍쥐페리는 훌륭한 불법의 전수자로 자리매김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