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별과 친구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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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강 위의 별이 빛나는 밤, -빈센트

『어린 왕자』의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우리처럼 무명의 사막에 빠져 헤매는 범부에 지나지 않았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이억 부 이상 팔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의 판매 부수를 앞지른다 해도 그나 우리나 무명의 사막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매한 중생이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의 사막에서 메말라버린 감수성을 보는 것과 달리 그는 자신의 비행기를 몰고 가다 추락하여 죽음과 직면한 절체절명의 순간 그 황폐한 사막에서 마음과 이성의 눈으로 우정의 본질을 발견한다.
그것은 친구 어린 왕자의 도움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떨어진 어린 왕자가 들려주는 친구 이야기가 아니라면 이 베스트셀러 작가 역시 평범한 비행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비행사는 마음의 눈으로 어린 왕자를 만나 그의 친구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 간다.
어린 왕자의 친구는 교활하다는 인상을 주어 사람들이 혐오하는 여우였다. 선입견과 편견을 벗어난 어린 왕자에게 여우는 간교한 본능적 동물로서의 편견을 벗어나 인간의 마음을 열어주는 지혜의 상징이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왕자와 달리 이성적 동물이자 에너지의 근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우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어린 왕자는 여우로부터 그가 추구하던 지혜가 길들인 마음으로만 터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입을 다물고 어린 왕자를 오래오래 바라며 자신을 길들여 달라는 여우에게 어린 왕자는 세상에 나가 친구를 만나고 베울 것도 많다며 자리를 뜨려 한다. 그러자 지혜의 상징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길들이는 것들만 알 수 있지. 사람들은 이제 뭘 알려고 시간을 들이지 않아. 가게에서 완제품을 사거든. 그런데 친구를 파는 가게는 없으니 이제 친구도 없는 거지. 친구를 원한다면 나를 길들여!”

지혜란 서로의 길들임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마음의 친구를 머리로 이해하고 아는 척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여우가 이러한 사실을 경험한 것도 아닌데 알고 있는 반면 어린 왕자는 이 길들임의 지혜를 모르면서도 여우에게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비행사인 작가는 대오각성하게 된다. 누구에게나 있다고 여겨오던 친구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친구를 잊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친구가 있던 것은 아니다.”

친구가 된다는 것은 세상에 흔한 아는 사이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필요한 사이가 되는 것이다. 친구가 되어 서로 필요한 사이가 된다는 것은 서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선재동자처럼 어린 왕자가 우리에게 전하는 말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우정의 의미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곧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만난 진정한 도반의 의미이기도 하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 헌사에서 자신의 책을 친구에게 바치는 이유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 책을 어떤 어른에게 바친 데 대해 아이들에게 용서를 빈다. 내게는 그럴만한 각별한 사정이 있다. 이 어른이야말로 세상에서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정이 있다. 이 어른은 모든 것을, 심지어 아동도서도 이해할 수 있다. 세 번째 사정은 이렇다. 이 어른이 지금 프랑스에서 굶주린 채 추위에 떨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어른을 위로해 주어야 한다.”

어른들은 숫자에만 연연한다.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꺼내도 부모들은 절대 본질적인 것에 관해 물어보는 법이 없다. 친구 목소리나 취미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는 친구의 성적, 친구 아버지 연봉에만 관심을 둔다. 그것을 알아야 비로소 친구를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친구 집 창틀 화분에 무슨 꽃이 피고 지는지는 묻지 않고 그 집이 몇억 짜리인가를 묻는다. 그래서 친구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면 어린애 취급을 한다. 내가 어린 왕자를 좋아하고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해서 그의 화집을 모으고 있다고 이야기하면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내 친구가 삼성 그룹 계열사 사장이라고 하면 나를 다시 쳐다본다. 우리 사회는 이 모양이다. 하지만 이 사회를 탓하지 말자. 우리는 모두 형제이니까.
『어린 왕자』와 더불어 프랑스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작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마지막 구절도 이런 의미에서 깨달음의 경지를 보여 준다.

“별자리와 별들이 가득한 이 밤을 마주하고 나는 난생 처음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에 나를 열었다. 이 세상이 그토록 나와 닮고 그토록 형제다움을 깨닫고 나는 내가 행복했었음을 느꼈고, 또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카뮈의 『이방인』 또한 『어린 왕자』처럼 또 하나의 별 이야기인 것이다. 카뮈는 별을 보고 세상의 진실을 발견하듯 생텍쥐페리도 별에서 자신의 진실을 발견하였다. 별을 사랑한 우리 시인 윤동주처럼 세상의 별을 친구로 삼은 사람들이 바로 예술가인 것이다. 누구나 좋아하는 화가 빈센트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프랑스지도에 표기된 도시나 마을의 작은 점들을 보노라면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떠올라. 왜 인간은 하늘에서 찬란히 빛나는 별까지 갈 수 없는 걸까. 틀림없는 사실은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동안은 별에 갈 수 없다는 거야.”

어린 왕자는 무거운 몸으로는 친구가 살고 있는 자신의 별에 돌아갈 수 없었다. 어린 왕자는 낡은 껍데기 같은 몸을 벗어재끼고 죽음에 이르러 오롯이 마음으로 소행성 B612호로 돌아간다, 그의 소원은 멋진 자신의 별에서 녹슨 도르래 달린 우물인 지구별을 바라보며 비행사 친구를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친구가 있는가? 나는 그에게 필요한 친구인가? 나는 그를 책임질 수 있는 사이인가? 단 한 사람이라도 그런 사이를 누릴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진정한 인간의 조건을 갖춘 것이다. 그는 분명히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일 것이며 별을 보며 그대의 미소를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어느 보살처럼 백제 불상의 미소를 지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