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의 지혜와 자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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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가 방문한 여섯 별 가운데 마지막 별인 소행성 330호에는 지리학자가 살고 있었다. 어느 별로 가야 친구도 찾고 지혜도 얻을 수 있을지 묻는 어린 왕자에게 이상주의인 지리학자는 지구의 평판이 좋다며 지구 방문을 권유한다.
지리학자의 말을 믿고 지구를 찾은 어린 왕자. 그는 사람 하나 없는 지구 모습에 적잖이 놀란다. 행성을 잘못 찾아온 건 아닌지 두렵기까지 했다. 하지만 달빛 고리처럼 모래 속에서 꿈틀거리는 뱀을 보고 엉겁결에 뱀과 인사를 나눈다. 뱀과 다정히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이 지구의 아프리카 사막에 떨어진 것을 알게 된 어린 왕자는 아무도 없는 사막의 돌 위에 홀로 앉아 하늘을 올려 보며 말한다.

“별들이 환히 빛나는 건 언젠가 저마다 자기별을 다시 찾아낼 수 있게 하려는 건 아닌지 궁금해. 내 별을 바라봐. 바로 우리 위에 있어……그런데 참 멀군!”

자신을 사랑해준 장미를 찾아 소행성 B612호로 돌아가고픈 마음에서 우러나온 어린 왕자의 진정어린 독백이었다. 하지만 그는 희한하고 가느다랗게 생긴 뱀에게서 아무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고 여겼다. 어린 왕자의 이런 속셈을 간파한 뱀은 어린 왕자 발목을 금팔찌처럼 휘감으며 날카로운 지혜와 무한한 능력을 암시하는 선문 선답 같은 자비심을 베푼다. 뱀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는 왕의 손가락보다 강하고 지혜롭기에 어린 왕자를 누구보다 더 멀리 데려갈 수 있다고. 하지만 자신을 건드리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가 나온 땅으로 되돌려 보낸다고. 그런데 순진하고 다른 별에서 온 어린 왕자인 만큼 고향이 그리우면 언제고 그를 귀환시켜 주겠다고.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하고 스스로 수수께끼를 모두 풀어낼 수 있다고 말하는 뱀. 생텍쥐페리는 기독교 사회에서 일상적인 혐오의 대상이자 악의 상징으로 소개되는 뱀을 지혜와 자비의 화신으로 제시한다. 『어린 왕자』의 서두에서 생텍쥐페리가 처음으로 모사한 모자 속 코끼리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거대한 폭력 독일 나치를 그린 것이며, 자기보다 덩치가 큰 포악한 코끼리를 통째로 삼키는 뱀은 순수한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는 지혜로운 현인을 그린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뱀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의 선한 독침으로 어린 왕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여 육신의 허물을 벗고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데 있다고 하겠다.
처음 지구에 도착하여 뱀을 만난 순진한 어린 왕자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뱀의 지혜로운 말 속에는 죽음의 경험을 통해서만 진정한 변화와 새로운 생명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어린 왕자가 이 말의 의미를 깨닫고 뱀을 다시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로부터 거의 1년이 지난 후였다. 여우를 만나 장미가 투정을 부리고 자신을 성가시게 한 것이 사랑 때문이었음을 깨닫고 장미에게 돌아가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뱀이 자신을 멀리 데려가 줄 수 있다고 한 말을 떠올린 것이다.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노랗고 독성 강한 뱀은 이집트 코브라와 케이프 코브라 두 종류가 있다. 하지만 이집트 코브라는 삽화에 보이는 코브라처럼 완전히 노란색을 띠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코브라는 케이프 코브라일 가능성이 높으나 케이프 코브라는 남아프리카에만 서식하므로 이 코브라는 두 종류 코브라를 합성한 생텍쥐페리의 상상의 코브라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1935년 북아프리카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하여 사흘간 죽음과 사투를 벌인 조난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조난 당시 사막에서 보았던 코브라에 노란색을 입혀 태양과 신성, 지혜와 풍요의 상징으로 노란 코브라가 탄생한 것이다. 노란색은 이집트, 인도, 중국, 아즈텍 등 고대 문명사회에서는 이러한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 초기 불교 승려들 역시 노란 가사를 입는다. 그리스 문명에서는 사랑과 조화를 의미하면서도 질투를 유발하는 색으로 이중성을 띠고 있으며,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문명에서는 배반을 암시하는 유다의 색으로 통한다.
어린 왕자가 만난 뱀이 “사람들끼리도 외롭긴 마찬가지란다.”라고 했듯이 뱀의 노란색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유대인에게 부여한 소외의 색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구보다 멀리 어린 왕자를 고향으로 데려가는 뱀의 노란 색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죽은 자의 영혼을 환생시키는 무덤의 색이기도 하다. 수호신으로서의 뱀은 영혼을 환생시키는 노란색을 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뱀은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상징한다. 기독교의 경우 모세의 청동 뱀을 제외하면 뱀은 언제나 유혹과 죄악의 상징이었지만 서구 문화에서 뱀은 결코 혐오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붓다의 수행과 관련하여 코브라의 역할은 매우 각별하다. 깨달음 직전 깊은 명상에 든 붓다를 숲의 정령인 죽음의 신 코브라가 독충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냈다. 광배에 코브라를 새기는 것은 이러한 사연을 재현하고 있을뿐더러, 위대한 진실로서의 사성제를 깨닫기 위해서는 죽음보다 더 강한 권능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고대 문명에 보이는 뱀은 대부분 지혜와 변화, 재생과 탈피를 상징한다. 뱀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그 허물을 벗어 거듭나며,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새로운 생명을 되찾을 수 있도록 인간을 도와준다. 장미를 버린 죄책감으로 고뇌하는 어린 왕자가 뱀을 만난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뱀은 어린 왕자에게 죽음 속에 죽지 않는 길이 있음을 깨우쳐 준다.
매 순간 죽음을 통해 지금의 나를 버리지 않으면 원래의 청정함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린 왕자의 말을 듣고 그의 아픔을 본 뱀. 어린 왕자가 이기적인 어른이었다면 귀찮게 여기며 그냥 스쳐 지나갔을 터이지만 먼 데서 온 순진한 손님을 반김의 시선으로 맞이하는 뱀은 크게 환희심을 내어 어린 왕자가 장미에게 돌아갈 수 있는 지혜를 선물한다. 어른인 비행사는 아직도 사회적 통념에 빠져 뱀을 경계의 대상으로만 인식한다. 뱀과 대화하는 어린 왕자를 미쳤다고 여길 정도이다. 하지만 기독교 문화를 제외하면 뱀을 혐오의 대상으로만 바라본 경우는 드물다. 지금 대중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린 왕자』의 뱀은 인간의 무명을 밝혀 불필요한 악을 물리치는 진실의 빛으로서의 뱀을 자리매김하고 있다. 여우도 마찬가지이다. 왜 어린 왕자는 사람들이 경계의 대상으로 삼은 여우를 찾아가 친구로 맞이할까?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독을 지닌 뱀, 우정의 지혜를 가르쳐 주는 여우. 지금의 나를 버리지 않고 그 누구도 친구 맺을 수 없다. 육신의 나를 놓지 않고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우정과 죽음의 지혜를 전하는 여우와 뱀을 통해 우리의 변화를 호소하고 있다. 어린 왕자와 함께 ‘나를 위한 나’로부터 ‘남을 위한 나’오의 여행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나’로부터 ‘내가 모르는 나’로의 여행을 시작해보자.

허물을 벗지 않은 뱀은 죽은 뱀이다. ―니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