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이야기 13: 이것은 모자가 아닙니다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탈피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묘사하면서 왜 생텍쥐페리가 뱀과 여우를 사악하고 간교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지혜와 우정의 친구로 자리매김하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았다. 인간의 무명을 밝혀 불필요한 악을 물리치는 진실의 빛으로서의 뱀. 장미와의 사랑을 깨닫게 해준 여우.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지혜와 우정의 이미지로서의 여우와 뱀을 통해 우리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충고하고 있다. 어린 왕자는 고정관념의 틀에 얽매인 시선에서 벗어나 호기심 어린 눈을 갖게 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로부터 ‘미지의 세계’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위의 그림은 20세기 현대 화단의 가장 위대한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인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작품으로 「이미지의 배반La trahison des images」)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수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전시회가 열렸을 정도로 유명한 화가로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 작품은 동양화처럼 그림과 글의 이중 구조를 띠고 있다. 상단에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흡연용 파이프 그림이 떠 있고, 하단에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고 쓰인 글이 깔려 있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감상자들은 관습적으로 회화 속 오브제를 일상에서 만나는 상품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회화 속에 재현된 파이프는 일상용품으로서의 파이프 그림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마그리트는 고정 관념의 틀에 얽매인 우리의 눈을 일깨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파이프 그림과 그것과 상충하는 내용의 글을 모순되게 배치하였다. 화가가 그린 그림은 파이프의 재현이지, 파이프 자체는 아니라는 말이다.
실제로 이 그림 속 파이프로 담배를 피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 기이한 그림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재현된 그림이 파이프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니다. 이 그림은 분명히 파이프의 모습을 띠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파이프 모습을 띠고 있다 해서 이 그림을 보면서 흡연용 파이프로 단정해버릴 수도 없다. 화가 마그리트는 실제로 다음의 파이프 도안 속에 자신이 꿈꾸는 아름다운 집의 구조를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파이프 오른쪽 머리 부분 큰 공간은 식당 그 옆은 복도, 아랫부분은 담장, 파이프 손잡이 가운데 불룩한 원은 당구대, 파이프 끝은 수도꼭지로 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파이프 이미지의 외형과 무관하게 그 이미지의 내용은 집이 될 수도 있고, 아파트 한 채도 될 수 있으며, 심지어 우주를 담은 대상일 수도 있다.
모자가 아니라 뱀입니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그림을 보면서 자신이 쉽게 연계시킬 수 있는, 현실에 실재하는 어떤 특정 대상과 연계시키려 한다. 다시 말해 고정된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본다. 학벌, 지위, 재산 등의 자신의 필요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 풍부한 지식이나 경험은 없어도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그러한 어른들의 고정된 시선의 요구에 길들여지며 꿈과 희망, 사랑과 우정을 잃어 가고 있다.
어린 왕자는 거대한 독일 나치의 폭력을 의미하는 코끼리를 삼키고 있는 지혜와 진실의 상징으로서의 보아뱀을 그리고 어른들에게 보여주며 무섭지 않은가 물었다. 어른들은 소년 생텍쥐페리가 화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그린 그림의 사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구동성으로 모자가 뭐가 무서우냐며 그림 따위는 얼른 때려치우고 문법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비아냥거렸다. 생텍쥐페리가 그토록 간절하게 소망하던 화가의 꿈은 그렇게 풍비박산 났다.
위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오른쪽 끝 뱀 머리 부분에 눈이 달린 것을 알 수 있다. 눈 달린 모자는 이 세상에 없다. 이 뱀은 거대한 군사력으로 유럽을 침략한 독일 군대를 나타내는 코끼리를 머금고 있었다. 작은 진실이 거대한 폭력과 억압을 이겨내리라는 생텍쥐페리의 염원을 담았던 것이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외형만을 중시하여 자신의 눈에 익숙한 것을 보고 싶어 하고 그러리라 단정하며 가르치고 만족스러워한다.
문제는 이러한 고정된 시선을 주위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투여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에 근거하여 습관적으로 사람을 재단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자신만의 솔직한 관점과 낯설고 경이로운 시선은 사라지고 고정된 틀 안에서 사람을 판단한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다른 취향과 역량을 지니고 있다. 서로 오랜 대화를 통해 교감을 갖고 서여 그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그 이미지는 보는 사람의 필요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진실성에 따라 빛을 발한다.
『어린 왕자』의 뱀의 이미지가 그러하다. 사악함과 간교함이라는 고정된 이미지의 틀을 벗고 친밀하게 다가온 뱀과 여우. 『어린 왕자』를 읽은 독자라면 뱀에게서 진실의 이미지와 여우에게서 우정의 이미지를 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보드가야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정각을 이루기 직전 깊은 명상에 든 붓다를 독충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낸 것도 숲의 정령이자 죽음의 신인 코브라 아니던가.